직업상담사 자격증 공부를 한창 할 무렵 봤던 한 상담심리 모형이 여전히 뇌리에 박혀 있다. 나도 정신적으로 썩 무던한 편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누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상대의 심상찮음, 앞으로 소개할 상담심리 모형의 용어로 바꿔 말하자면 '비합리적 신념체계'를 발견했을 때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앨버트 엘리스라는 심리학자가 고안했다는 《인지 정서 치료(RET: Rational-Emotive Therapy)》에는 항목의 앞 글자만 따 <ABCDEF 모형>이라고 명명한 재밌는 이론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A(Activating Event-선행사건) : 시험에 떨어졌다.
B(Belief System-비합리적 신념체계) : 시험에 떨어지다니 나는 정말 쓸모가 없어.
C(Consequence-결과) : 자기를 비하하고 우울해하며 다음 시험을 준비하지 않음.
D(Dispute-논박) : 시험에 불합격한 것이 그렇게 끔찍한 일인가?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시험에 합격하는가? 한 번에 합격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잖나?
E(Effect-효과) : 우울해하거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다음 시험 공부에 열중한다.
F(Feeling-감정) : 병가지상사, 잘 할 수 있다 등 긍정적인 감정과 수용적인 태도 견지
이론이라고 해서 거창할 듯싶은데 그냥 일상에서 벌어지는 감정적 부침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허나 상담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상담이론과 기술이 탁월한 상담자의 지시적 개입이 이뤄져 내담자(의뢰인)의 비합리적인 신념을 붕괴시키는 ‘논박(Dispute)’ 단계가 이 모형의 가장 핵심적이면서 결정적인 모멘텀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지나친 신념 내지 과도한 비하에서 기인한 우김질에 대응하는 대화술에 늘 골몰하는 나로서는 <ABCDEF 모형>의 ‘D’단계에 꽂힌 건 아주 당연하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조차 비합리적일 때가 없지 않다. 누가 봐도 도덕 교과서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인생을 사는 사람조차 허점은 있게 마련이다. 부침과 굴곡으로 점철된 삶이야말로 전형적이고 보편적이라 볼 수 있다면 오롯이 온전한 삶을 누렸다는 사람이 오히려 별나 보인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만 날 뿐 사람은 누구든 비합리적이고 비전형적인 태도나 감정을 꾹꾹 누르고 살다가 중대하고 결정적인 사건에 직면한 순간 격납됐던 것들이 갑자기 불거져 나와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끝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만약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우울해하기만 하고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한다면 세상에는 정신병원만 대성황을 이루겠지만 대부분은 슬기롭게 헤쳐나간다. 셀프 논박이 원활하게 이뤄진 셈이다. 헌데 혼자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면 우리는 주변 지인한테 SOS 신호를 보내면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카페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선술집 한 켠에서 소주잔을 부딪히는 장면은 ‘D’단계의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 앞의 그(녀)가 늘어놓는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되 상대가 가장 불편해하는 무엇(사건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는)을 정확하게 파악해 그(녀)의 합리적이지 못한 상태를 직격하는 강단이 절실하다.
자격증 준비에 급급한 나머지 입문 단계에서 멈춰 버린 상담심리학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합리적이지 못한 의뢰인이 쌓아올린 모순이라는 철옹성을 감정의 생채기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허물 수 있는 논박의 기술이란 게 혹시 있다면 속속들이 섭렵하고 싶은 심정이다. 뭣보다도 논리정연한 사고의 틀과 타인의 짓이겨진 감정을 보듬을 줄 아는 감성이 조화를 이뤄 어려운 현실이 닥쳤을 때 내담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다시 일어서서 어려운 현실과 힘껏 부딪쳐가며 싸울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전인적全人的 태도를 견지하는 게 내 최종적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