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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푸른 밤

by 김대일

서울서 회사 다닐 때 출장차 당일치기로 들렀던 걸 빼면 제주도는 대학생 시절 두 번 다녀온 게 다다. 2학년 때였는지 4학년 때였는지 두 번째 방문 시기는 가물가물하지만 편도 12시간 걸리는 부산-제주 여객선 3등칸에 몸을 싣고 난생 처음 제주도로 향하던 1학년 여름방학의 어느날 저녁은 똑똑히 기억한다.

과내 연극동아리 <도끼비>는 가을에 예정된 국어국문학과 학술제에 올릴 연극 연습에 앞서 단합과 사기 증진을 위한 워크숍을 제주도에서 열기로 했다. 여학생이 다수인 학과 특성이 동아리에도 유감없이 발휘돼 제주도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일곱 명 인원 중에서 남자는 연출을 맡은 86학번 예비역 형과 91학번 새내기 나뿐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하선한 우리는 제주항을 기점으로 하고 제주공항이 종점인 반시계 방향으로 제주도를 일주하는 3박4일 여행길에 올랐다. 시일이 촉박하기도 하거니와 대학생 뻔한 호주머니 사정 탓에 제주도 내륙 진출은 꿈도 못 꾸고 섬 외곽으로 나있는 해안도로(올레길은 한참 뒤에 생겼지 아마)를 따라 무작정 걷거나 가다 지치면 오가는 공용 버스를 정류장 아닌 데서 기어이 히치하이크하는 식으로 유명짜한 관광지, 해수욕장을 수박 겉핥듯 눈요기만 하는 게 여행의 전부였지만 말이다. 해안도로나 해수욕장이라면 부산에도 없지 않지만 이국적인 제주도만의 풍취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오묘한 낯섦이랄지 이질감이 입도한 이후로 주욱 여행자들을 설레게 했던 건 고행같던 여행이 선사한 큰 선물이었다.

특히 제주도를 떠나기 전날 목격한 석양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내 생애 최고의 장면 중 하나다. 일행이 마지막 밤을 나려고 정한 숙소는 성산 일출봉이 손에 잡힐 듯 바라다 보이는 민박집이었다. 넓은 뜰에 놓여진 큼지막한 평상에 오손도손 앉은 일행은 라면과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안주 삼아 제주도산 소주(그때 마신 소주 이름은 모르겠다)를 들이켜며 일출봉에 내려앉는 석양을 온몸으로 즐겼다. 마치 신화 속 신들의 거처인 양 장엄한 분위기로 일몰을 연출하는가 싶더니 어머니의 보드라운 품속같은 제주 바다가 더없이 따사로운 기운으로 에뜨랑제를 보듬었다. 나흘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넓디 넓은 제주도를 일주하겠다는 자체가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반편이들에게조차 제주도는 그가 품은 매력과 영감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제주 바다, 제주 푸른 밤, 제주 길, 제주 사람….

쟁쟁한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긴 하나 기대에 비해 내용은 밋밋해 나로서는 좋은 점수를 못 주겠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별안간 두근 반 세근 반 내 심장을 날뛰게 만든 유일한 장면은 김우빈이 한지민과 밤산책을 나섰을 때 배경으로 잡혔던 제주의 푸른 밤이었다. 밤인데 푸른빛이 왜 도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일랑 하지 마시라. 제주 푸른 밤을 만끽해보지 못한 이한테 설명할 능력이 나한테는 없으니까. 삼십 년도 더 지난 오래된 기억 속의 제주 푸른 밤이 고스란히 내 눈앞에 소환되자 문득 그때 제주의 모든 것, 모든 장면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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