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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억

by 김대일

삼십일 년 전 제주도 여행이 연상 작용을 일으켜 잊었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추억에 꼬리를 문 다른 추억이 뒤따르더니 자기는 왜 냅두냐면서 또 다른 추억이 등에 올라탄다. 쓸 만한 글감 찾느라 고민이었는데 마침 잘 되얏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듯 추억팔이로 몇 자 남길까 한다.

장면 1.

입도는 바닷길이었지만 출도는 하늘길을 택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했는데 어째 걸쩍지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산행 비행기가 다 지연이었다.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이랬는데 지연이 길어지면 결항도 염두에 둬야 했다. 부산에 도착하면 곧장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날 안에 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쪽 사정을 전하기에는 삐삐는 무용지물이었다. 답답했다.

고교 동문 연합서클 신입생 소개 자리에서 처음 만나 눈이 맞은 뒤로 내내 붙어 다녔다. 학과 동아리 워크숍을 제주도로 간다고 했을 때 주저했었다. 제주도라 가고 싶었지만 그녀와 떨어지는 건 또 너무 싫어서였다. 그런 나를 설득한 건 되레 그녀였다. 가을 학술제 올릴 연극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은 사람이 워크숍을 안 간다는 건 모양새가 영 안 좋고 다른 곳도 아닌 제주도를 안 가겠다는 건 멍청한 짓이라면서 말이다. 같은 나이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세근이 들었다는 말이 맞다. 그녀 말에 수긍해 떠난 제주도 여행 덕분에 연극은 준비부터 공연까지 무난했고 내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기억에 남았으니까.

언제일지 모를 비행기 출발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공항 대합실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서 엽서를 도대체 몇 장을 썼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써재낀 거였지만 너무나도 강렬했던 제주도 여행의 여운이 그녀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죄책감과 끈적끈적하게 뒤섞여 엽서는 연서가 되어 바다 건너 그녀를 더욱 갈망했다. 화학과 사무실로 엽서가 도착한 건 부산에 도착하고 일주일쯤 뒤였다. 엽서를 받고 눈자위에 눈물 맺힌 그녀를 보며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 나는 그녀를 꼬옥 안아줬다.

장면 2.

연극은 당일 오전 오후 두 차례만 올렸다. 성황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공연을 마쳤다. 오후 공연 이후 가질 뒤풀이는 축제를 방불케 할 만큼 요란뻑적지근할 것 같았다. 학과 학술제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분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 나와 기다리고 있던 그녀와 함께 51번 좌석버스를 타고 KBS부산홀로 향했다. 거기서 한영애가 나레이터로 참여한 김현식 1주기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91년 당시 김현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90년 11월 1일 사망했다. 사망 직전에 낸 6집 앨범 수록곡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점 외에 김현식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젓가락깨나 두들겨 본 선배들이 세상 다 산 사람인 양 김현식 노래를 울부짖는 걸 학사주점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목격한 나는 어느새 김현식에 경도되었다.

S형은 내 고교 동문 선배이자 같은 대학교 법대 88학번인 J형의 친동생이다. J형 인연으로 만났지만 J형과 나온 고등학교가 달랐다. 그런데도 자기는 재수해서 들어왔으니 같은 91학번이라도 꼭 형이라고 존대를 하라며 을렀다. 성격 까칠한 S형을 따라 하루는 형네에서 하룻밤 신세질 때가 있었다. 군대 간 J형이 제일 아끼는 거라면서 꺼낸 건 말로만 듣던 김현식 1집, 2집 카세트 테이프였다. 거기에 3집, 4집, 5집, 6집까지 덤으로 밤새 카세트를 돌려댔다. 그 밤이 계기가 되었던 게 틀림없다. 김현식에 빠져 살다가 마침내 김현식은 우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밥 거르는 건 참아도 술 거르지는 못하던 철부지 새내기 시절, 학사주점 골방에 앉아 니나노 장단에 맞춰 나는 <떠나가 버렸네>, <사랑했어요>, <언제나 그대 내 곁에>, <그대와 단둘이서>, <그대 내 품에>, <그 거리 그 벤치>, <비처럼 음악처럼> 따위를 늘 불렀다. 그건 내 곁에 다소곳하게 앉아 경청하던 그녀에게 바치는 나의 연가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녀가 김현식을 썩 좋아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술자리에서 윤종신의 <처음 만날 때처럼>을 쭈뼛쭈뼛 불렀고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을 즐겨 들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자 열광하던 보통의 X 세대였다. 그에 비해 김현식은 궁상 떠는 예비역 선배들과 어울리는 막걸리 파티에서나 어쩔 수 없이 듣는 한물 간 노래였음에도 그러는 나를 그녀가 못마땅해한 적은 없었다. 김현식 1주기가 가까워지자 그 추모 열기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연극 공연 일정이 겹쳐 아쉬워하던 나를 위해 입장권을 구매해준 건 그녀였다. 물론 연극이 끝나고 뒤풀이 행사 때문에 못 간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배려의 말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탈주를 나는 택했고 <졸업>이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버스 간에 뛰어 올랐다.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가객의 때이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스크린에 투영된 김현식의 생전 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내 울었다. 그런 나를 그녀는 보듬어 줬고 어느새 그녀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었나 보다.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김현식과 그녀에 둘러싸여 나는 슬픔과 행복이 뒤범벅이 된 밤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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