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고대 그리스 비극을 소개하는 TV 강연 프로그램을 우연히 시청하다 현재 그 작품이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가 아이스킬로스(7편), 소포클레스(7편), 에우리피데스(18편) 세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러다 문득 비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자비로운 여신들>과 관련해 예전에 끼적였던 어떤 메모가 떠올랐다(3부작을 읽은 적 없어서 메모 역시 비극에 관한 건 아니다).
<자비로운 여신들>의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한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공간은 델피 신전밖에 없다고 여긴 오레스테스는 거기로 가 신들의 재판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란다. 델피는 그리스 단어로 ‘자궁’을 의미하는 ‘델퓌스delphys’에서 유래했다. 돌고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돌핀dolphin’도 생김새가 자궁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델피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장소인 옴팔로스가 있다. 인간은 이곳에서 신성을 회복하여 야만에서 문명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결심과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인간이 오래된 자아를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델피야말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장소인 셈이다. 델피에서 오레스테스가 구원받은 까닭이겠다.
내가 메모한 건 델피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인의 세 가지 새김글에 관한 내용이다. 델피는 고대 그리스를 거쳐 로마 시대에서도 자신을 새롭게 변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내용을 자세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2세기 로마시대 집정관이자 작가였던 플리니가 이 곳에 와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세 가지 새김글을 발견하였다고 전한다. 하나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 너 자신을 알라’이다.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다. 두 번째는 ‘메덴 아간’, 즉 ‘어느 것도 무리하게 실행하지 말라’이다. 지혜로운 삶은 중용을 지키는 삶이다. 세 번째 새김글은 ‘엑귀아 파라 다테’, 즉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말라. 불행이 가까이 와 있다’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침묵을 지키는 자다.(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카타르시스, 배철현 비극 읽기-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복수가 아닌 역지사지의 공감 위에서>, 한국일보, 2017.09.02.)
세 가지 새김글은 각각의 독자적인 글이 아니고 하나의 뜻으로 연결된 신탁이다.
그노티 세아우톤, 메덴 아간, 엑귀아 파라 다테
지혜로운 자는 줏대가 세 자신을 똑바로 응시할 줄도 제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줄도 아는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