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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불렀을 수 있는 <가시리>

by 김대일

우리 시대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저술가로 손꼽혔던 고종석을 다시 읽는 중이다. 특히 우리말과 글에 관한 그의 저서는 터진 입이라고 다 말이 아니고 무조건 써재낀다고 다 글이 아니라며 통렬하게 꾸짖는 듯하다. 우리말과 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근본이 없는지는 말하고 쓰는 일이 잦을수록 뼈저리다. 허웅, 김영송으로 이어지는 부산 국어학계 학풍의 본거지였던 학과에 왜 그토록 등한했는지 후회만 막급하다.

언어학자로서의 고종석을 재음미하려고 중고책 몇 권 구입했다. 손님 뜸할 때 찬찬히 디다볼 요량이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알마, 2014)은 사랑과 관련된 일흔여섯 가지 표제어 아래 사랑에 대한, 사랑의 말들에 대한 빛나는 상념들이 펼쳐진다. 외워서 노래로 부를 줄 아는 몇 안 되는 시 중 하나가 고려가요 <가시리>다. <가시리>에 대한 고종석의 단상이 참신해서 옮겨 적는다. 나도 저자처럼 <가시리>의 화자가 남자라고 본다. 성별이 다르다고 연애와 이별의 감정이 판이할 리 없으니까.


가시리 가시리잇고(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바리고 가시리잇고(버리고 가시렵니까)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나더러는 어찌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버리고 가시렵니까)


잡사와 두어리마나난(붙잡아둘 일이지만)

선하면 아니 올셰라(시틋하면 아니 올세라)


셜온 님 보내옵노니(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듯 도셔 오쇼서(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

빼어난 연애시들이 대개 이별의 시이듯이, <가시리>도 이별의 노래다. 통속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시의 화자話者는 여자다. 이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애소哀訴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情調가 여성적 정서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해석일 것이다. 전투적인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겐 이 시의 패배주의가 혐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그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하자면, 나는 이 시의 화자가 남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소와 원망과 설움과 체념 따위의 정조는 딱히 여성적인 정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랑의 정서다. 연애란 그런 것이다.(『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8~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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