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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뜨기의 부산살이

by 김대일

십 년 가까이 정수기를 관리해 주던 분이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후임자가 삼 개월에 한 번 있는 정기 점검차 그제 우리집을 찾았다. 방문 날짜를 타진하려고 며칠 전 먼저 연락을 해왔는데 일성에서 위쪽 출신인 줄 확 알겠더라. 키가 훤칠하고 다소곳한 말투가 인상적인 사십 대 초반 남성은 역시나 부산 내려온 지 겨우 석 달째인 서울뜨기였다. 평일 오전 정수기를 앞에 두고 남자 둘이서 헤식은 풍경을 연출하기가 뭣해서 사는 데는 어디냐, 장사 해먹기로야 사람 많고 돈도 많이 도는 서울이 훨씬 수월할 텐데 부산까지 내려온 까닭이 무어냐 밑두리콧두리 물었는데 심심하던 차에 잘 되얏다 싶었는지 그 양반 장단 한번 잘 맞추더군.

서울에서 요식업 가게를 두 개씩이나 운영하다가 하나는 직원한테 넘겼고 다른 하나는 계속 운영 중이랬다. 배우자가 부산서 사는 게 로망이었는데 문제는 내려가서 뭘 해먹고 살지 선뜻 안 떠올라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알게 된 정수기 관련 업이 진입은 용이하고 큰돈까지는 못 벌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다 판단이 돼 올해 1월 혼자 먼저 내려와 여지껏 현장 경험을 쌓는 중이라고 유수처럼 쏟아냈다. 다음 달 중순께 배우자가 내려올 예정이라 최근에 동래구 사직동 근처에 집까지 구해 뒀단다. 부산 내려가면 영도에다 거처를 마련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알 만한 사람 열이면 열 다 만류하는 통에 관뒀다고도 덧붙였다. 부산에 살기 편한 데가 수두룩하고 영도야 놀러 다니는 유람 코스 중 하나로 족하다며 마치 입을 맞춘 양 똑같은 소리라 신기했는데 몇 달 살다 보니 이해가 간다고 했다. 영도를 포함한 부산 몇몇 지역의 슬럼화에 따른 심각한 도심 소멸을 그도 슬그머니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신간이 편한가 보더라.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외지인의 부산 입성, 그 중에서도 특히 수도권에 살다 부산에 내려온 이들이 가장 체감하는 부산살이의 편의성은 집값이다. 그 역시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싼 집값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으니 알조다. 현재 거주하는 집이 자가인지는 더 캐묻지 않아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다 쓰러져 가는 아파트도 십억부터 시작한다'는 그의 말로 미뤄봤을 때 부산에서 살 집을 구하는 데 큰 애로는 없었을 걸로 여겨진다.

부산살이가 로망이라는 배우자와 당장은 허니문 같은 시기를 보낼 테지만 부산살이가 마냥 좋을 리 없을 게다. 거대 도시 서울에 비해 없는 건 아예 없고 있다 한들 빈약할 게 뻔하다고 느끼는 순간 부산행을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니. 덩칫값에서 밀리는 부산의 현실에 실망이 클지는 몰라도 그걸 빌미로 그가 섣불리 서울로 복귀를 꾀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점검을 끝내고 건넨 말이 귀에 콕 박혀서다.

"현장 경험을 쌓느라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건데 부산엔 마음 좋으신 분들이 참 많으셔요. 그 고객님들과 친분을 잘 유지해서 그분들 관리권을 회사로부터 구매할 작정입니다. 일종의 영업권인 셈인데 회사와 교섭이 가능합니다. 서울 같았으면 꿈도 못 꾸었을 계획이죠. 거기는 오늘만 보고 말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서요. 너무 삭막해요."

오전에 점검받은 정수기인데 공교롭게도 저녁부터 물이 안 나왔다. 아직 풋내기여서 뭘 잘못 건드렸나 부아가 살짝 났는데 다음날 새벽에 정수기 뚜껑을 열어보니 개폐 밸브가 좀 이상했다. 반대 방향으로 돌렸더니 물이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점검하면서 밸브를 푼다는 걸 나하고 얘기하느라 깜빡했나 보다. 내가 똑바로 만진 건지 확인차 연락했더니 제대로 한 거라면서 자기 잘못을 순순히 시인했다 아주 다소곳하게. 그러자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 그만,

"고맙습니다."

그가 말하는 마음 좋으신 분들 중에 나도 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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