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賞春한다는 핑계로, 여름방학이라는 핑계로, 입시 끝났다는 핑계로, 납회納會를 핑계로 계절따라 꼭 모이던 녀석들은 뿔뿔히 다 흩어져 얼굴 못 보고 산 지 몇 해짼지 기억도 없다. 모임의 중추였던 L이 세상을 뜬 이후로는 누가 누가 더 데면데면하나 시합이라도 하는 양 담쌓고 지내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91학번 남학생 모임은 속절없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그제 P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자로 개업 소식을 알리자마자 나보다 더 들떠서 축하 전화로 화답한 3년차 사회복지공무원 K와는 달리 P는 내 문자에 답글만 왔었다. 답글이나마 와줘서 안도한 까닭은 하루하루가 끌탕인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였다.
대일아..축하한다. 내가 지금 개싸움 중이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다. 끝나고 회복하면 찾아가마. 올 여름 전에는 끝이 날까 싶다.
P는 현재 이혼 소송 중이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전 부인이 자녀 양육과 재산 분할 소송을 걸어 녀석이 대응하는 중이다. 녀석은 술, 담배를 전혀 못 한다. 촉망받던 시인에서 문학평론가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아득바득대는 국어교사로 순조로워야 할 녀석한테 전 부인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지 좀 됐다. 부부 사이는 당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지만 불화의 씨앗을 뿌린 것도 전 부인이고 파경의 열매를 무럭무럭 키운 것도 오롯이 전 부인이었다는 걸 P를 아는 지인이라면 인정하는 바다. 전 부인 역시 교사이고 한두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좁아터진 부산 교단에 매인 몸들이니 쉬쉬할 따름이지. 허나 선생 노릇 한 적 없고 애들 학교 학부모 총회조차 가본 적 없는 말하자면 부산 교육계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는 부부 생활의 금도를 깨고 무람없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배우자의 불성실한 작태를 비난하며 숨은 감정까지 여과없이 드러내는 데 주저할 까닭이 없다. 그건 어쩌면 녀석을 위해 의도된 망발이었는지 모른다. 속이 문드러지도록 분에 겨워도 대놓고 욕 한번 할 줄 모르는 샌님인 P 속에 잠재된 분노와 증오를 녀석 대신 마구 쏟아냄으로써 발하는 대리 만족 말이다.
그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P의 목소리는 의기소침하지도 그렇다고 썩 밝지도 않았다. 선임한 변호사가 이혼전문이 아니라서 점점 수세에 몰리는 감이라 결국 변호사를 바꿨다고 했다. 변호사 선임비만 두 배라고 투덜댔지만 불과 한 달 전 문자에서 비춰지던 파국의 후유증은 훨씬 덜한 듯싶었다. 변호사 선임비의 백분지 일만 나한테 술값으로 투자하면 변호사보다 더 너를 속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농을 걸자 무슨 개수작이며 시시덕거렸다. 그 웃음에 마음이 놓였다.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식음 전폐하는 건 자멸의 지름길이라고 을렀더니 요새 너무 잘 먹어서 아랫배가 튀어나왔다고 받아쳤다. 그 너스레에 마음이 또 놓였다. 조만간 꼭 만나자는 마음뿐인 내 제안에 여름 넘겨 겨울까지 소송이 길어질지 모르겠지만 그게 못 볼 이유는 아니라고 화답하는 녀석이 고마웠다.
그나마 연락을 이어가는 동기는 둘뿐이다. 3년차 사회복지공무원인 K와 이혼 소송 중인 P. 두 녀석과 나는 공통점이 있다. 기간제 교사를 전전하다 서러운 꼴 숱하게 당했던 K와 빚잔치로 호시절을 다 탕진한 나는 이미 인생의 바닥을 찍은 셈이고 P는 한창 바닥을 향해 급전직하 중이다. 바닥 아래 지하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는 P이지만 선험자로서 바닥 아래 지하실 따위는 결단코 없다고 안심시킨다. 그러니 바닥 찍고 다시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 각기 처한 상황은 달라도 밑바닥 인생을 경험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드문드문 묻는 안부지만 전보다 사이는 더 끈끈해지는 느낌을 받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계절따라 만나던 동기들 다 흩어지고 남은 두 녀석이 일당백의 아우라로 나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그들에게도 나란 놈이 그랬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