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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왜 그래

by 김대일

일흔여섯이라고 나이를 밝힌 손님은 두 번째로 가게를 찾았을 때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다고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로 내 가게에서 커트와 염색을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 손님은 구포 어디쯤에 자기 단골 가게가 엄연히 있고 요금도 똑같지만 같은 값이면 사는 동네 가게를 밀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묻지도 않은 말까지 주워섬겼다. 개업 초기 아무리 손님 한 사람이 아쉽다고 해도 말부터 앞서는 사람은 내 성정으로는 썩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자기를 한껏 추어올리는 사람은 남보다 더 대접받길 원하는 기질이 다분해 점방 주인 입장에서는 성가신 게 한둘이 아니란 걸 경험으로 직감했다. 느닷없는 호의에 경계부터 들었던 까닭이다.

첫 방문에서 밝힌 요구 사항은 이랬다. 커트는 한 달에 한 번, 염색은 보름에 한 번 꼴로 하는데 매달 초순, 중순, 하순에 들르는 줄 알고 꼭 기억하랬다. 마치 회사 대표가 수행 비서한테 일정 관리를 지시하듯 말이다. 그때가 사월 보름께였으니 그제 두 번째 방문이 시기적으로 얼추 맞다. 가게문을 열고 막 들어오더니 두 번째 방문의 의의에 대해 한참을 생색 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고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와서 커트와 염색을 한꺼번에 할 테니 그리 알라며 도로 나가는 게 아닌가. 나가서 또 뭔가를 고심하는 듯하더니 다시 들어와서는 마침 손님도 없고 하니 매상 올려주는 셈치고 오늘 온 김에 하고 가겠노라 번복하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노인은 멀끔하게 생겨 로맨스그레이 신사 타입이지만 언제 봤다고 초장부터 반말로 아랫사람 다루듯 하는 채신머리는 첫 방문부터 여전해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낯선 동네에서 가게가 롱런하자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의 후원이 절실할 거라며 자못 뻐기는 뉘앙스를 띤 언사에 밸이 꼴리지만 삭히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개업 초기 단골 노릇하는 손님들의 정기적인 방문이 가게 기틀을 잡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준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니 밉든 곱든 서비스에 만전을 기하는 게 맞다. 내가 긴장한 건 그 직후다. 노인이 은근슬쩍 던진 힐난이 돌연 사무쳐서다.

"김 사장, 근데 내가 막 들어오려는데 표정이 왜 그리 무서워?"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노인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내 눈매에 역력했었나 보다. 숨은 속을 들킨 양 뜨끔했다.

"그럴 리가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표가 바로 드러나 들통나기 십상인 내 대답을 듣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 노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포커페이스가 전혀 안 되는 게 내 치명적인 약점이다. 얼굴만 봐도 니 편 내 편 바로 갈리다 보니 사회생활하는 데 애로가 많았고 운신의 폭은 좁았다.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라면 마인드 컨트롤이 소싯적보다야 원활해져야겠지만 그제 노인네에게 쉽게 간파당한 걸 보면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자고로 서비스업자는 오장육부를 제 집 출입문 위에 걸어두고 집을 나서는 법이거늘 자기 감정도 잘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놈의 얼어죽을 장사란 말인가. 슬쩍 던졌는데 깊이 박혀버린 노인의 비난에 자괴감마저 일었다.

금주부터 실외 마스크 제한이 풀렸다고 하지만 나는 실내외 상관없이 앞으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닐 거다. 내 약점을 반나마 가려줄 만한 건 마스크밖에는 없어서. 덧붙여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봉할 작정이다. 군소리에 묻어 나올 내 감정의 쓰레기를 주워 담을 자신도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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