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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가 이도

by 김대일

왕자의 난을 일으켜 조선 3대 국왕으로 등극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애초에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려고 책봉한 세자는 제2비 신덕왕후의 소생이면서 여덟째이자 막내인 의안대군 이방석이었다. 고로 태조, 태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 적장자 왕위 계승이란 원칙은 말뿐이었다. 그러니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의 책봉은 놀랄 일이 아니다. 철저하게 왕권주의자였던 태종 입장에서 능력은 없고 방탕만을 일삼아 성군의 자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아들을 적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왕위를 물려줄 리 없다.

좀 놀란 건, <태종 이방원>이라는 드라마가 정사에 기반했다는 전제 하에, 충녕대군이 세자 양녕대군을 대신해 대권을 거머쥘 여지가 보이자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연출하려고 기도企圖한 게 맞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책벌레에 얌전한 청년 이도와는 달리 엉큼한 야심가가 아닐까 의심하지 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도 묘사된 바이지만 충녕대군이 급변하는 정세를 인지하고 행동한 근거는 여럿 있다.

1.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냈다. 이 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2.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한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충녕대군의 말이 맞다며 모두 세자를 욕하는 등 세자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댔다. 한 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로는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3. 결정적인 단서. 충녕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 때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충녕대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케이스라면 꾸짖고 역모로서 고변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을 뿐이었다.​ 만일 충녕대군이 이를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의금부에 끌려가 실컷 매타작을 당하고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될 정도의 위험한 언행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서는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 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대군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나무위키 <세종(조선)> 내용에서 인용)

세종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그간 적잖았다. 거기 등장하는 세종의 모습은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인자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묘사된다. 심리 묘사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나 <태종 이방원>에 등장한 충녕대군은 그의 야심가적 이면을 드러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성싶다. 이런 드라마가 딱 취향이다.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발상을 자아내게 하는 전복과 반전, 재밌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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