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글을 떠올리다

by 김대일

- 고교 선배님 내신 책을 보는데, 예전에 니 글에 올렸던 사진이 나오네. 니 생각 나서...잘 지내지?

국내 최대 통신사에 근무하면서 사진도 찍고 시집도 내는 다재다능한 C가 그제 보낸 카톡이다. 고교 선배가 냈다는 책 속의 사진도 함께 보내왔는데 내가 모를 리 없다. 바로 故 임응식 작가의 <구직>이었다. C 카톡에 대한 내 답글은 다음과 같았다.

- 그럭저럭 지낸다. 너는 건강하고? <구직> 사진 처음 접했을 때가 아마 룸펜 노릇할 무렵이었지 싶다. 피사체와 동일시했었던 것 같다. 마침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개봉돼 작은 파문이 일던 때이기도 했지. 덕분에 사진에 대한 급관심을 가졌으니 나한테는 은혜로운 사진이다. (…)

문득 C가 언급한 예전 내 글이 궁금해 뒤져봤다. 그 글은 아마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바로 귀가하지 않고 동네 한 선술집에서 청승맞게 혼술하다 끄적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진이 주는 충격적인 비애감을 안주 삼아 마구 써갈겨댔었다.

답글의 마무리는 사진 청탁이었다. 요즘도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으러 나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에 관한 한 만만찮은 내공을 지닌 C의 사진을 얻으면 글쓰기 소재로는 딱이다.

- C야, 새로 찍은 거 있음 몇 컷 보내다오. 사진 보고 감상문 써서 글 게시하게. 매일 올리는 게시글, 글감 딸려 매번 고생이다.

이렇게 글 맺으려니 좀 아쉬워서 예전 썼던 글 옮긴다. 과연 피사체와 나를 동일시했는지 가늠해 보라.

<구직>과 오래된 미래(2017.01.23.)

초3 막내딸 겨울 방학 막바지로 기억한다. 방학 내내 빈둥거리다 엄마한테 제대로 혼쭐이 났다. 자녀 양육에 젬병일 수밖에 없는 워킹맘의 무력함을 반지빠르게 간파한 딸내미였다면 진작에 방학 숙제부터 미리 끝냈을 테지만 방학때만이라도 척척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엄마 마음은 아랑곳없이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빈둥거리다가 개학이 코 앞에 닥쳐 허둥대더니 딱 걸린 게다.

숙제 리스트를 훑어보던 엄마는 우선 관람 체험부터 서둘러야겠다며 일요일 댓바람부터 온 식구를 끌고 가까운 부산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제법 알싸한 날씨였음에도 이중섭 그림을 전시하는 화랑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황소>만이라도 실물로 보고 싶었지만 미술엔 영 판무식꾼인데다 방학 숙제 해결하러 나와서 어쭙잖은 짓 하는 것 같아 비싼 유료 관람 핑계 대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바로 옆 전시관에서 <시간의 산책자들>이란 타이틀을 걸고 부산 출신 작고 사진 작가전이 무료란다. 꿩 대신 닭으로 한참 걸어 지친 두 딸의 등을 밀어 입장을 시키긴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추상성을 강조하는 회화와는 결이 달라선지 전쟁이란 아수라장에서 아득바득 발버둥치는 인간 군상들이 흑백 프레임에 핍진하게 담겨 생동감과 애틋함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사實寫가 연출해내는 묵직한 리얼리티가 무료한 나를 잔잔하게 들쑤셔 놓았다. 그러다 어떤 사진 앞에서 그만 굳어져 버렸다. 무표정이 소름끼치도록 절망적인 젊은 사내가 벙거지를 푹 눌러쓴 채 벽에 기대고 서 있다. ‘求職’이란 글자가 슬프게 박혀 있는 명패를 두르고. 묘한 끌림이었다. 고故 임응식은 자기 작품 경향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살롱 사진’만을 알고 있던 내가 종군사진기자로 참전 후 사흘 간 셔터 한 번 누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상 나의 사진 이념의 혁신을 위한 진통의 순간이었다. (중략)

사진 작품은 결코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참혹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사진 작품의 대상이다. 내가 새로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생활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하고, 내가 가는 사진가의 길은 바로 이 길이라고 생각했다.(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 임응식의 회고록』에서)

1953년이란 캡션이 달렸으되 뒷배경이 되는 미도파 미장원이 미도파 백화점(1954년) 이후에 생긴 걸로 유추한다면 연출된 사진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론자의 주장에 작가적 양심을 의심해 보지만 ‘그 형태가 너무도 완벽하고 풍부하며 또 그 내용의 호소력이 너무 강한 결정적 순간’의 강렬함으로 그것이 설령 의도된 연출이었다 해도 보는 내내 내 심장은 마구 펌프질을 해댔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관람 후기를 쓴 이문재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극장을 나오면서 떠오른 것이 기본소득이었다. ‘개가 아닌 인간’의 사회, 주권자로 거듭난 시민들의 공동체로 가는 가장 빠른 길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마침 『녹색평론』 최근호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관점과 만났다.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확인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의 『분배정치의 시대』라는 책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 자체를 주라, 그것도 현금으로. 퍼거슨 교수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퍼거슨 교수는 생산이 분배의 토대가 아니라, 분배가 생산의 토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자녀를 교육시키는 부모를 보라는 것이다. 일자리가 생긴다 해도 대부분의 노동과 임금이 더 이상 생존의 요건이 되지 못하는 시대, 99%가 잉여로 전락하는 시대다. 인간을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상호의존적 존재이며, 사회는 공감과 연대에 의해서만 지속가능하다는 ‘오래된 미래’를 지금 여기로 초청해야 한다. 그러면 국가 전체가 생산한 부를 모든 국민이 떳떳하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2017.01.23. 경향신문, <이문재의 시의 마음-다니엘 블레이크와 ‘물고기 잡는 법’> 에서)

<구직> 사나이의 무표정은 잉여 인간으로 전락한 오늘날 99%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지독하게 침울한 절망을 푹 눌러쓴 벙거지로도 감출 수 없듯이 시장논리에 매몰되어 보편적 가치가 무색해진 사회를 헤쳐 나가야만 하는 자들의 좌절된 미래는 그 어떤 위선적 구제책에도 개선되기 어렵다. 생존의 버거운 쳇바퀴를 쉼없이 돌려대지만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도로 제자리. 억척스런 각자도생에 사활을 거는 엄혹한 현실 앞에 인간의 존엄성은 의미를 상실했다. ‘자존심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블레이크의 주장도 공허하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진 않더라는 냉소가 지악스런 현실을 대변할 뿐.

시인은 인류학자의 대안을 만지작거리면서 공감과 연대로 구축된 '오래된 미래'를 재소환하자고 부르짖지만 시대는 이미 몰지각과 불합리로 난도질당한 지 오래다. ‘분배 정치’를 새로운 도덕적 가치로 제시하는 바람이 시인의 천연덕스런 감수성에서 비롯된 순진무구한 치기로, 실현 불가능한 공상적 발상으로밖엔 달리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지독한 회의주의자로 변질된 내가 더 절망적일지 모르지만.

​혹한 떨치려 들이부은 공복 소주가 너무 과했나 보다. 망언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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