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 옛날이여!

by 김대일

다른 운동 놔두고 유독 씨름에 집착했던 계기는 분명치 않다. 내가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갈 1980년대 중반이 이만기를 필두로 한 천하장사 씨름대회 대유행기였던 건 맞지만 꼭 그에 편승해 씨름을 즐긴 건 아니었던 성싶다. 야구는 장비값이 비싸 못 해 먹겠고 장거리 달리기를 곧잘 즐겼는데 같은 반에 육상부 선수 두 명이 늘상 1~2등을 해 처먹는 바람에 배알 꼴려 못 해 먹겠어서 다른 거 찾다 눈에 뜨인 게 아마 씨름이었지 싶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맞붙어 자웅을 겨루는 스포츠, 흔히 격투기라고 일컫는 운동은 깔끔해 마음에 들었다. 기술을 걸어 상대를 자빠트리거나 되치기를 당해 내가 넘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쌈박하게 이뤄지는 시합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승복이다. 결과가 분명한데 야료를 부리는 건 스스로를 추하게 만들 뿐이다. 진득하지 못한 성미도 한몫 거들었을 거이다. 샅바 쥐고 길어야 5분 안에, 어떨 땐 '시작!'과 동시에 승부가 결정나는 속전속결의 미학이 씨름의 매력이라는 걸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부터 알아챘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전광석화처럼 상대를 누일 기술과 체력을 길러보겠다고 방과후 집 갈 생각없이 학교 가장자리 네모진 씨름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그때 씨름판 모래깨나 같이 씹었던 일종의 스파링 파트너를 몇 해 전 우연히 본가 동네 근처에서 조우했었는데 골프 강사한다면서 명함을 내밀더라. 골프가 자세를 중히 여기는 스포츠라고 하면 어릴 적 씨름으로 단련한 장딴지 힘만으로도 중심 흔들릴 일은 없을 테니 강사 노릇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돼먹잖은 상상을 해봤다.

선수도 아니면서 씨름에 푹 빠져 살던 중학생이 뺑뺑이로 들어간 고등학교엔 공교롭게도 당시 명성이 자자한 씨름부가 있었다. 졸업하면 프로팀에 들어가 부귀공명을 이루는 게 꿈인 진짜 씨름 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당시 체육 특기생들이 대체로 그렇듯 교실 맨 뒤에서 수업시간에 잠만 자다가 훈련시간 때만 비지땀을 흘리는 그들과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은 여타 책상물림들하고는 가는 길이 분명 달라 서로를 도외시했지만 나는 먼 발치에서나마 연습에 몰두하는 그들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떻게든 안면 트고 말문도 터서 들배지기 기술을 걸었는데 왜 번쩍 들리지 않는지, 호미걸이 기술을 효과적으로 걸자면 내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따위를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씨름부 감독이 일반 학생의 연습장 출입에 난색을 표했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하듯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당시 교정 분위기 때문인지 씨름부한테 말 거는 자체가 큰 모험일 수밖에 없어서 훈련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보는 걸로 끝났지만 씨름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다른 고등학교 체육대회에는 씨름 종목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는 반 대항 씨름 단체전을 종목에 꼭 끼워 넣었었다. 2학년 때만 석패했을 뿐 1, 3학년 때는 우승을 했고 당연히 나는 그 우승의 주역이었다. 특히 3학년 예선 시합으로 기억하는데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시키듯 백두급 깍짓동을 상대로 태백급인 내가 한 판을 내줬지만 내리 두 판을 따낸 건 쾌거였다. 대입 시험에 목을 매는 인문계 고등학교 체육 행사라는 게 시간 때우기 식으로 대충대충 하고 말아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당시 담임 선생은 교실 맨 뒤에서 잠자던 씨름부의 승부욕을 깨워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씨름만은 우승해야 한다면서 선발된 인원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기술 전수를 명하신 덕에 진짜 선수들한테 개인 교습을 받는 호강을 다 누렸다.

밑도 끝도 없이 웬 씨름 얘긴가 싶을 거이다.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엉덩이에서 허벅지, 장딴지로 내려오는 라인은 탱탱 그 자체였다. 이만기나 강호동하고 비교할 바는 못 되나 소싯적에 한 운동 하셨냐는 소리를 곧잘 듣던 탄탄한 하체는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자존심 그 자체였다. 엊저녁이었지 아마. 샤워한 몸을 타월로 닦다가 엉덩이를 만졌더니 바람 빠진 풍선 두 쪽이 붙어 있는 줄 알고 낙망했다. 탄력이라고는 하나 없이 돼지 비계를 갖다 붙인 양 축 늘어진 살만 손에 잡히는 게 내 엉덩이가 맞나 싶더라구. 허벅지와 장딴지는 또 어떻구. 화가 난 듯 불끈불끈하던 근육은 다 어디 가고 없이 밋밋하게 빠진 게 꼭 중국집 나무젓가락 두 쪽 같아 민망할 지경이었다. 요새 바람만 불어도 휘청휘청거린 까닭이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아, 옛날이여!

작가의 이전글시 읽는 일요일(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