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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

by 김대일

용이가 인도네시아로 건너간 지 햇수로 사 년이 넘었지 아마. 부옹富翁의 마름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이십 년 외길을 고수했던 신발회사를 관두고 새로 부상하던 신예 신발회사 임원으로 영전했을 때 이직의 변을 구구절절 밝히지는 않았으되 안정으로 얻게 되는 정체보다는 도전과 성취욕의 갈망이 녀석을 훨씬 쑤석거렸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리기 좋아 이사지 현지 공장 터잡기부터 공장 준설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모든 걸 다 책임지고 일궈 내라는 명을 받잡고 인도네시아로 떠날 때는 혹시 월급만 센 노가다 팔자가 아닌가 싶어 안쓰러웠다. 게다가 미증유의 역병까지 온 세상을 덮쳤으니 무덥고 습한 타국에서 겪었을 심신의 부담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용이는 꿋꿋했다. 천성이 낙관적인데다 제 아무리 열악해도 주어진 여건을 제 위주로 갱신시킬 줄 아는 능력이 탁월한 녀석이 가뭄에 콩이 나듯 전하는 메시지에는 언제까지 이러란 법 있겠냐는 극복 의지가 거뜬하고 봉사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사서 고생하는 데 따른 응당한 대가를 꼭 지불받겠노라는 당찬 포부도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살면서 은인이라고 여길 만한 이가 있는가. 친구지간에 은인 운운하는 게 마땅찮기는 하나 용이는 바닥까지 떨어진 나를 구원해 준 은인이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일자리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어중잡이를 어떡하든 뿌리내리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 걸로도 녀석은 은인으로 충분히 대접받을 만하지만 그에 더해 더 파 봐야 밑이 안 보이게 추락한 내 자존감을 꾸역꾸역 끌어올려 줬다는 게 되우 은혜로웠다. 부러 분위기를 잡고 녀석이 격려하고 충고해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말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결정적일 때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치열하고 독한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전하고픈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즉, 과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고 망한 과거가 현재의 너까지 정의내리는 건 아니라고, 지금-여기에 몰입함으로써 하루라도 빨리 재기의 발판을 삼으라고, 그러니 더럽고 아니꼬와도 주어진 상황에 충실해야 한다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 너만한 녀석 또 없다고.

같은 고등학교 같은 인문 계열이었지만 같은 반 된 적 없어 데면데면하던 녀석과 같은 대학교를 들어갔다고 해서 관계가 급변했을 리 없다. 그저 동기들끼리 어울려 학사주점에서 술 처먹고 니나노 장단 맞추는 게 전부였으니까. 이른바 운동권의 핵심인물로 밤낮없이 짱돌이나 화염병을 집어던지던 녀석이 학내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졸업하면 장교로 입대할 나와 공통분모로 겹칠 리 만무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마흔 중반에 다시 만났는데도 파락호나 다름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나를 덜떨어고 값싼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어제도 같이 소주잔 기울인 동네 친구인 양 스스럼없이 대해 준 건 의외였지만 한편으로 고마운 배려였다. 과거의 좋았던 잔상에 기댄 바 없지 않겠지만 어떠한 편견도 거부하고 사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웬만해서는 내재화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그 미덕을 자연스럽게 발현시킬 줄 아는 게 용이의 최대 장점이고 그걸 직접 목격한 나다. 녀석의 거침없고 걸걸한 입담에 당혹스러워 하다가 종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이가 없지 않다. 없지 않다가 수다하다의 완곡한 표현이라면 녀석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지점이긴 하다. 허나 그것이야말로 서먹한 관계의 거리를 한 치라도 좁혀 보려는 녀석만의 시그니처임을 간파한다면 그가 달리 보일 게 분명하다.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전 가끔 만나 소주잔 기울일 무렵 수다히 주워섬기는 녀석의 청산유수에 성마른 내 정서를 맡기고 잠시나마 안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용이는 언제쯤이면 부산에서 예사롭게 만나볼 수 있을까. 이유랄 게 없이 괜히 울적하고 적적하면 거칠 것이 없는 녀석이 참 그리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회포 풀 여지가 사라지는 듯해 영 아쉽고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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