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다구'라는 상호를 달고 돼지고기 값으로 맛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가게가 내 점방과 마주보고 있다.
지나다니는 행인들 보라고 붙여 놓은 메뉴판엔 갈비살, 안창살, 눈꽃살을 섞은 모듬세트 2~3인분은 삼만 칠천 원, 3~4인분은 사만 칠천 원이라고 쓰여져 있다.
자기가 구입한 염색약을 맡겨 놓고 그걸로 보름마다 염색하러 오는 손님이 그 가게 옆에 산다기에 가게 촌평을 부탁했더니 그 손님 왈,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라나. 맛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 하니 평가가 박하다. 아무튼 술 파는 음식점이 대개 그렇듯이 그 가게도 오후 느지막하게 문을 연다. 오후 네다섯 시께 문을 열어 대여섯 시쯤 마수걸이를 할 때면 나는 마감을 슬슬 준비한다. 엊그제였다. 마감 다 되서 들어온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가게 정리까지 마치니 금세 여덟 시였다. 불을 끄고 막 나가려는데 맞은 편 가게 앞에서 남자 세 명이 쪼로미 앉아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포착됐다. 아마 고기 굽고 술 마시다 떼로 나와 느긋하게 한 대 태우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려니 무심히 넘기면 그만일 풍경에 그만 꽂혀 버린 나는 그들이 되우 부러웠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마음 맞는 이들과 홀가분하게 한 잔 걸치는 대폿잔의 맛을 모를 리 없는 나는 그랬던 적이 언제였었나 더듬어보다가 실패했다. 낡아빠진 영사기 속 빛 바랜 필름 돌 듯 과거의 즐거운 어느 한 때를 애타게 찾던 나는 가게 문 닫는 것도 잠시 잊고 그들의 나른한 저녁을 동경할 뿐이었다.
오 년 전에도 그랬었나 보다. 이런 글을 남긴 걸 보면.
한참 《보스턴 리갈》이라는 미드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보스턴의 한 로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일종의 법률 드라마인데 정치 풍자에서 화장실 유머까지 코미디 요소가 여기저기에 깨알같이 박혀 있어 잔재미가 쏠쏠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창 때 두루 섭렵하던 여러 미드 가운데서도 유독 《보스턴 리갈》을 들먹이는 까닭은, 매 에피소드가 끝나갈 무렵 두 주인공인 앨런 쇼어와 데니 크레인이 어둠이 깔린 보스턴의 한 발코니에서 위스키와 시가를 끼고 앉아서는 해당 에피소드를 매조지하는 장면이 어김없이 연출되는 게 인상깊어서였다.
개성 강한 두 캐릭터가 보스턴의 밤을 풍경 삼아 조촐한 여유를 부리며 예의 능청스런 말투로 다사다난했던 에피소드를 아퀴 짓는 모습이 허름한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단했던 하루를 갈무리짓던 우리의 한때와 정서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아 무척 정겨웠다. 극적 재미를 극대화하려는 드라마임을 감안한다 해도 썩 평범하지 않은 두 남자가 벌이는 왁자지껄을 꼭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딸 텐데 죽이 맞는 파트너 하나 없으니 염조차 못 내겠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는 ‘요시다 루이’라는 이름의 중년 아저씨가 도쿄 외곽의 술집을 찾아가서 술 마시고 나오는 게 끝인 15분짜리 케이블 TV 프로그램 《요시다 루이의 술집 방랑기》를 소개했는데, 처음엔 맹숭맹숭한 성싶다가 그가 프로그램에 꽂힌 이유라며 대는 대목에서 그만 확 끌렸다. 그토록 그리던 술집 풍경!
술집 여기저기서 단골들이 한마디씩 하는 게 들린다. 카운터 한구석의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의 등지느러미가 없다. 요시다가 묻는다. “얘 지느러미 어디 갔어요?” 저쪽에서 한 단골이 취기 어린 소리로 말한다. “여주인이 잘라서 태워가지고 술에 담가 마셨지요.”(일본에선 생선 지느러미, ‘히레’를 태워 청주에 담근 ‘히레사케’를 마신다.) 다른 손님들도, 여주인도 웃는다. 그런 실없는 농담!(임범, <야! 한국사회>, 한겨레, 2018.01.16.)
꼭 불타는 금요일 저녁이 아니어도, 꼭 누룩내 진동하는 술판이 아니어도 좋다. 해 질 녘 보스턴 리갈의 발코니 혹은 요시다 루이의 술집 같은 곳에서 파란만장했던 하루를 앨런과 데니 같은 녀석(들)과 함께 조촐하고도 쌈박하게 마무리짓는 저녁은 ‘저녁이 있는 삶’의 또 다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자주 드나들던 동네 꼬치 가게가 문을 닫았다. 바짝 조인 고삐를 풀고 이완의 난장을 부리던 단골집은 '임대'란 조악한 글자만 남기고 적자라는 모진 현실 앞에서 사그라졌다. 인심 좋은 단골집도 사라지고 술맛 나는 얼굴도 가물가물해지는 요즘엔 마시나 안 마시나 지독한 서글픔에 늘상 취해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의 다른 풍경(2018.10.25.)>)
나른한 저녁을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