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는 냉정하다

by 김대일

두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정수기 점검을 받는 날이었다. 근 몇 년 간 우리집을 담당한 업체 사장님(직원으로 들어왔다가 아예 그 대리점을 사버렸다나)은 볼일 다 마치고 가기 전에 생색을 냈다.

- 냉온수 동작 레버를 공짜로 교체해 드렸습니다. 지난 번 점검 나왔을 때 그게 낡았으니 서비스로 바꿔 달라고 막내따님이 어찌나 조르던지. 다음 번 점검 때 갈아주겠다는 확답을 안 주면 그냥 안 보내겠다나요. 초등학생이 참 야물딱지대요.

마침 옆에서 둘째딸이자 막내딸이 듣고 있다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사장님, 우리집 막내는 쟤고요 사장님이 만난 애는 큰딸입니다. 대학생인데 그것도 2학년.

화들짝 놀라는 사장님.

- 몸집은 작지 얼굴이랑 목소리가 영판 어린애라서.
- 뷔페 가서 대인 둘 소인 둘이라고 대도 군소리 안 하고 입장시켜 줍니다. 앳되 보여서 요긴할 때가 많아요. 정작 당사자는 몸서리를 치지만.

운동(펜싱)을 꾸준히 해서인지 중2 들어 키가 부쩍 커진 막내딸은 여섯 살 많은 지 언니를 알로본 지 꽤 됐다. 덩치까지 커서 괜히 까불었다간 뼈도 못 추린다. 그래도 줄기차게 지 동생한테 깐족대는 언니다. 그런 언니가 밉지 않은지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는 동생이고. 그렇게 놀고자빠진 두 자매를 보는 나는 무척 즐겁다.
장난질을 칠 때는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허물없어 보인다. 그러다가도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자의 지혜가 필요하거나 부모를 대신하야 집안 규율을 다잡아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 고분고분한 양처럼 언니에게 순순히 복종한다. 내가 보기엔 여섯 살 터울은 이완과 긴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완충지대같고 그 안에서 웬만해서는 선을 넘지 않는 자기 조절에 능수능란한 두 사람 간의 신사협정같기도 하다.
근데, 능청맞고 엉큼하며 깍쟁이면서 백여시같은 큰 녀석이 요새 동생 부려먹는 재미에 폭 빠져 큰일이다. 올 여름에 있다는 약학대 편입시험 준비를 핑계로 자기 방에 틀어박히면 집안일은 손도 안 댄다. 허물 벗은 뱀마낭 이부자리에서 몸만 빠져 나와 차려주는 밥이나 먹을 줄 알지 설겆이, 청소, 빨래 따위 가사는 남 일 취급하기 일쑤다. 게다가 잔머리는 어찌나 잘 굴리는지 지난 3월 제 생일을 앞두고는 '설겆이 한 달 면제권'이란 걸 만들어 동생한테 주고는 그걸 선물로 갈음하겠다면서 다시 받는 짓을 천연덕스럽게 벌이기까지 했다. 생일 선물 살 돈이 굳어서인지 뻔히 속이 보이지만 동조해준 막내는 정말로 한 달 동안 부엌데기 노릇을 도맡았다.
정수기 점검 받으면서 공짜로 냉온수 동작 레버를 교체한 날 저녁, 지난 주 종영한 드라마 「빈센조」 하이라이트를 유투브로 열나게 보고 있는데 부엌에서 한 번 더 하자고 떼를 쓰는 소리와 일수불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자꾸 다시 하자고 떼를 쓰는 건 무슨 경우냐며 실랑이를 벌이는 소란이 들렸다. 저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질이냐며 「빈센조」에 등장하는 빌런들의 죽음에 통쾌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둘이서 배꼽이 빠지게 낄낄대길래 안 디다볼 수 없었다.
이 무슨 조화인지 고무장갑을 끼고 설겆이거리 앞에서 울상을 한 큰 녀석이 아빠가 나타나자 동생이 설겆이를 시켰다고 일러바친다. 그러자 막내 녀석이,

- 어이가 없네. 언니가 설겆이 할 사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고 해서 내가 이겼어. 삼세판 하재서 내가 또 이겼어. 자고로 승부는 오판 삼승이래서 응해 줬더니 이기질 못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일곱 번 시합해 네 번 이기는 팀이 진정한 우승팀이라더니 언니가 또 졌어. 마지막이라면서 무조건 아홉 판 하자고 우기는 거야. 하도 질척대길래 받아줬는데 또 져. 자꾸 지는데 내가 어떻게 설겆이를 해 주냐고.
- 또 잔머리 쓰더니 쌤통이다.

앙증맞게 아빠를 째려보는 큰 녀석. 그러게 평소에도 동생한테 맨날 지는 가위바위보를 누가 하래? 어쨌든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무리 언니의 위엄이니 뭐니 해도 가위로 바위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승복하고 설겆이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번 꼼수를 기대해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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