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아니면 수제비

by 김대일

이용학원 갈 적마다 근처 한 칼국수 가게에서 점심을 때운다. 칼국수 가게일수록 거개가 반찬으로 내놓는 김치가 맛있는데 그 집 김치는 내 입맛에 특히 딱이다. 갓 담가 전혀 익지 않은 겉절이를 오로지 양념 맛과 아삭대는 식감만으로 꿀떡꿀떡 삼키는 내 식성이 좀 유별나기는 한데 그런 김치를 내놓는 식당이 학원 주위에는 흔치 않은 중에 발견해서인지 뱃속에서 끼니 때 됐다는 알람이 울리기만 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직행한다.
칼국수 가게니 메뉴가 단순할 것 같지만 칼국수, 수제비, 돌솥비빔밥 대분류 아래 칼국수와 수제비는 첨가물에 따라 들깨칼국수, 해물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및 바지락수제비 따위로 세분되는 나름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한 라인업이다. 하루 죙일 가게를 엿보지 않는 이상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이 뭔지 알 길이 없겠으나 주로 찾는 12시부터 2시 사이, 그러니까 두 달 넘도록 그 시간대에 그 가게를 어김없이 찾는 내가 보기엔 내가 앉은 자릴 뺀 여덟 테이블 손님들은 돌솥비빔밥을 유독 많이 주문하는 것 같았다. 부추를 갈아 밀가루 반죽에 섞어 면은 풀색을 띠고, 꼭 그래서일 것처럼 왠지 면발이 더 탱탱해 보이는 칼국수보다도 버젓이 칼국수 가게라는 간판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돌솥비빔밥을 편애하는 손님들에게 시비 걸 의도가 전혀 없지만서도 나는 항상 이상하다. 이렇게 맛나는 겉절이김치를 앞에 놔두고 왜?
돌솥비빔밥도 비빔밥이긴 마찬가지니 달궈진 돌솥 안에서 밥, 나물들이 양념장과 거하게 비벼진 뒤 입으로 투입된다. 돌솥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입 안은 비빔밥을 씹는 것만으로도 열일할 텐데 겉절이김치의 아삭아삭함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지, 자극적인 돌솥비빔밥 양념장이 겉절이김치의 양념을 심각하게 상쇄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 가게에서 가장 희멀건해서 김치가 없으면 목넘김이 억울할 것 같은 그냥 칼국수(이후부터는 '꾸미거나 딸린 것이 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인 '민-'을 붙여 민칼국수라고 하겠다)만 나는 시킨다. 내가 그 가게에 집착하는 까닭이 오로지 겉절이김치 때문임을 명심하라. 점심을 김치로 때우라고 해도 게걸스레 먹어치울 자신이 있다. 김치가 주식이니 칼국수는 식욕을 돋우는 전채일 뿐이니.
한번은 김치가 셨다 내 입맛으로는. 식사를 마치고 밥값을 계산하면서 서빙과 카운터를 맡은 바깥주인에게 갓 담근 겉절이김치를 맛보자면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정중하게 물어봤다. 주인장과 말문만 튼다면 김치 담그는 비법까지는 아니더라도 담그는 날을 슬쩍 알려 주거나 내가 먹을 김치만 따로 냉장고에 보관해 뒀다가 꺼내 놓는 특혜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말이다. 바지락도 해물도 안 들어간 민칼국수 곱배기만 매번 시켜서는 김치를 앞접시 두세 그릇씩 퍼먹는 희한한 녀석을 진즉에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깥주인은 '신 김치 못 먹겠다고 주방 사장님한테 말해 보슈'한다. 주방을 가리키는 눈은 찡긋거리면서.
요 며칠은 바지락수제비를 계속 시켜 먹었다. 희멀겋기는 민칼국수와 매일반이나 알이 통통한 바지락과 감자가 면발하고는 또 다른 부드러운 식감의 수제비와 더불어 겉절이김치에 제법 잘 어울려서다. 하여 칼국수 가게에서 내가 시키는 메뉴는 민칼국수에다 바지락수제비가 추가됐다. 가게에 들어서면 서빙을 맡은 바깥주인이 주문을 받는데 '뭐 드릴까?' 묻던 게 '칼국수 곱배기 드릴까?'로 바뀐 지 오래됐다. '오늘은 바지락수제비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오늘따라 웬 변덕이래? 하는 듯한 의아한 표정으로 주문을 받는 바깥주인. 그래도 나 같은 손님은 호구다. 민칼국수 아니면 바지락수제비 중에서 꼭 주문해 주방에서 할 일을 덜어주니까.
엊그제 갔더니 바깥주인이 부재 중이었다. 주방 안주인이 홀까지 나와 친히 주문을 받길래 '안녕하세요?'하고 아는 척을 했다.

- 뭘 드릴까? 돌솥비빔밥이 맛있는데 그거 드릴까?

아니, 이 무슨 망발이신가. 서운함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사장님, 내가 단골인 걸 정녕 잊으셨는지요? 나는 기운이 빠졌지만 뼈 있는 목소리로 주문했다.

- 칼국수 아니면 수제비죠. 오늘은 칼국수 곱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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