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일요일(50)

by 김대일

​누이제가

월명사/홍기문 의역


​생사 길이란

여기 있으려나 있을 수 없어

나는 간다는 말씀도

이르지 못하고 가버리는가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떠나선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야

미타찰에서 만날 것이니

내 도 닦아 기다리리라

(나온 지 이십 년도 더 넘은 책에서 죽음의 의미에 대한 글을 옮겨 시 감상에 갈음한다. 글은 고종석이 마흔을 막 넘겼을 즈음 썼다고 하는데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과 거의 겹친다. 그래서 신기하다. 좀 길긴 한데 그냥 옮기겠다. 죽음은 나의 딜레마다.)

'그러면 너는 왜 사는가'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관성으로'라는 대답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것을 생명체에 내재해 있는 자기보존 본능,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내가 내 삶에서, 또는 그 삶이 거들지도 모르는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얄궂은 것은, 내가 섭리도 법칙도 믿지 않는 만큼, 역사나 개인적 삶의 의미를 믿지 않는 만큼, 생에 대한 내 애착은 오히려 더 크다는 것이다. 내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더 애착을 갖는다. 나는 그것을 혐오하면서 그것에 집착한다.

마흔을 막 넘겼으므로 나는 앞으로 살아갈 세월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세속적으로도 탐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로 주변인의 삶이었고, 백수로 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삶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자살의 가능성이라는 '보험'(내가 이 아이디어를 배운 것은 에밀 시오랑에게서다. 그는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는 크게 낙망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정 견딜 수 없을 만큼 삶이 힘들게 되면 어느 날 자살을 해버리면 그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종명했다.)에 힘입어 나는 아마도 추레하게 늙어갈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란, 말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됨됨이에 따라, 그리고 나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다. 독실한 신자라거나 견결한 혁명가라면 그 두려움이 조금 작을 수는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같은 무신론자, 반혁명분자는 정도가 더 심하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내게는 이곳에서의 삶 이후의 영생이나 역사적 가치부여에 대한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무의미한 삶은 나의 유일한 삶이고,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세상의 모든 아침들이 하나하나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렇지만 남들이 그러듯 나 역시 오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일상생활이 유지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나는 엄연히 일상생활을 한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을 하면서는 죽음에 대해 잊는다. 그 일상생활 동안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맛난 술과 기름진 음식을 탐하고, 아이들이나 아내와 낱말맞추기 게임을 하고,『조선일보』를 욕하고, 하잘것없는 책들을 읽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의 마취에서 화들짝 깨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때는 자기나 가까운 친지가 몸이 몹시 아플 때거나, 갑자기 친지들을 잃었을 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타인의 죽음도 두려워한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슬프다. 염세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조차도 그렇다. 그렇다면 내 염세는 아직 덜 익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직 사랑할 누이와 벗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확실치는 않지만.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는 상투적 표현은 흔히 살붙이의 죽음을 맞은 사람의 슬픔을 묘사할 때 사용되지만, 그것이 엉뚱하거나 과장된 비유만도 아니고 꼭 가족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만도 아니다.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버렸을 때, 우리는 실제로 사지四肢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타주의 때문이 아니라, 이기주의 때문이다. 아니, 모든 이타주의가 확장된 이기주의라면, 그것을 이타주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를 묻고 슬픔을 느낄 때,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슬픔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위한 슬픔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묻을 때, 우리들의 일부를 거기에 묻는다.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을 미래의 가능성을 묻는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 뒤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은 바로 그 사라져버린 우리 자신의 일부가 유발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이를 위해 마련한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마련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고종석,『감염된 언어』, 개마고원, 1999, 253~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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