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행

by 김대일

마누라 혼자 처가엘 다녀왔다. 6월 첫째 주말쯤 식구들 거의 모여 장모 생신 축하연을 여는 게 처가의 연례행사인데 마침 현충일이 낀 연휴고 해서 느긋하게 즐겼을 게 안 봐도 선하다. 미증유의 역병이 돌기 전인 2019년 6월 초순에 처가를 방문한 이후로는 본의 아니게 교류가 끊긴 내가 언제 다시 처가를 찾을지 기약하기 어렵다. 역병이 돌 때는 그 핑계로, 5수 만에 이발사 자격증을 겨우 따는 바람에, 이번에는 장사 기반 잡을 때까지로 방문을 무한정 미뤘으니까. 기반 잡는다는 말은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그 쓰임새가 참 유용하기 짝이 없는 표현인 성싶다. 도대체 얼만큼 돼야 그 빌어먹을 기반이 잡히는지 헤아리기가 도통 어려우니 말이다. 아무튼 점방을 차리고부터는 손발이 온통 거기에 묶인 나로서는 처가쪽 얘기만 나오면 죄인마냥 그저 묵묵부답이다.

사실 열 일 제치고 마누라와 함께 처가를 갔어야 했다. 팔순을 훌쩍 넘겨 노쇠함이 하루가 다른 장모가 염려된다면 그깟 장사가 대수겠는가. 장모 입장에서야 줄줄이 늘어서 있는 일곱 명 사위 중에 뒤에서 두 번째 순번이어서 더 데면데면한 관계일지 모르겠지만 설령 그럴지언정 나는 장모를 결코 홀대해서는 안 된다.

마누라한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공교로운 상황에서 의도적이지는 않았다 해도 결과적으로 마누라와 처가 식구들한테 인간 말종으로 취급받더라도 유구무언이다. 장인 임종을 앞두고 처가 식구들이 총집결했다. 가장 먼 데 살던 우리는 마누라만 장인이 입원해 계시던 서울의 아무개 대학병원까지 새벽 택시를 대절해 달려갔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자 마누라는 부산으로 내려왔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바닥을 박박 기던 뒤웅박 신세였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해 막다른 길에 내몰려 하루하루를 산송장처럼 살았다. 상황을 타개하겠다며 법원 개인회생을 신청했지만 제반 조건을 갖추려면 몇 달은 더 빚 독촉을 감내해야 한다는 법무사 사무소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받아들여야 할 실정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던 당시 나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럼에도 마누라는 자기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 함께 지키자며 두 번째 상경길은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노친네가 아니다, 저번처럼 이번에도 고비를 넘기실 게다, 정 혼란스러우면 당신만 다녀 와라, 나는 여기서 할 일이 많다 따위 가당찮은 핑계나 대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 할 일이라는 게 고작 빚 독촉 전화 받으면 애걸복걸 사정이나 하고 완전히 파탄 난 교우 관계인지도 모르고 돈이나 꾸러 지인들 찾아다니는 게 다면서 말이다.

매정한 남편한테 크게 상처받은 마누라는 그길로 새벽 택시에 몸을 실었고 장인은 운명하셨다. 장모와 팔녀 일남 대가족의 대들보였던 장인의 죽음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큰 어른으로서 장인이 내게 베푼 크나큰 은혜에 나는 배은망덕으로 보답했다. 그 일 이후로 마음에 옹이 진 마누라와 겉으로야 그럭저럭 부부의 연을 유지하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에 봉합할 수 없는 틈이 생긴 걸 나는 직감한다. 하여 나는 그 틈이 더 크고 깊게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지난날의 과오를 희석시키기 위해서라도 장모를 뵈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못 갔다.

주말 저녁 수화기 너머로 장모는 건강하라는 말만 연신 되뇌이셨고 나는 찾아뵙지 못한 송구함에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세상에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 있다. 나한테는 장모 생신에 즈음해 처가집에 가야 하는 게 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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