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은 성적표를 늘 아비부터 먼저 보여준다. 성적이 형편없어도 쿨하게 받아 넘기는 아비 앞에서 시험 대비해 열심히 준비했고 최선을 다해 임했으니 나온 결과의 우열에 상관없이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청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식으로 아비를 맞장구치게 만들어 제 우군으로 포섭함으로써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뻔한 수작임을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그런 녀석이 이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입장은 아비가 먼저 천명한 바이고 방과 후 펜싱 운동으로 지친 와중에도 책상머리에 앉아 꾸준히 교과서를 뒤적거린 걸로 제 할 바는 다했으니 한참 처지는 성적을 받았다손 아비는 무심할 수가 있다.
헌데, 성적표를 건네면서 수업 풍경을 전하는 엊그제 막내딸 말에는 귀가 거슬리게 뜨악했고 신경까지 곤두섰다. 공부보다는 펜싱에 꽂혀 있는 녀석한테 호성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애면글면한다지만 과목별 성취도가 다른 학생에 비해 열등하다는 건 중간고사, 기말고사 성적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다. 물렁한 아비가 단호한 게 하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아닌 것도 분명 있는 법. 학생의 본분만은 꼭 지키라는 것이다. 즉, 종이 울리면 수업에만 오로지 집중하고, 설령 선생님 말씀이 전혀 귀에 안 들어오고 자장가로 들리지언정 졸지 말며, 진취적이지 못 하다고 수동적, 기계적이지도 말 것. 이는 수업이라는 시공간을 마음껏 유영해 인성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는, 배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시한부 호사를 부러 방기하지 말라는 선험자의 간곡한 부탁이겠다. 물론 이 따위 배배 꼬는 말로 막내딸을 다그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아이는 수업 시간만은 집중하려고 애를 쓰긴 한갑더라.
그럼에도 시험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수행평가에서도 저조함이 두드러지는 막내딸은, 또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비위가 좋고 낙천적이어서 남보다 처지는 것에 크게 주눅 들어하거나 자책하는 법은 없지만, 펜싱하는 학생, 펜싱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이 예정되어 있는 학생으로 스스로를 몰아 그런 상황을 용인받으려는 의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몇몇 과목 선생님들로부터 '펜싱하는 학생이니까…'라는 승인을 받은 게 끝맺지 않은 뒷말이 유쾌하지 않은 상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더욱 달갑잖다. 학생이니까 무조건 공부해야 하고 시험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학생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받으려면 수업에 동참해야 하고 설령 불가피하다 해도 수업의 열외자 취급을 받는 건 학생의 존재 의미를 부정당하는 거라 창피스럽게 여겨야 한다. 막내딸이 혹시 열외자 취급에 무덤덤해하는 건 아닌지 그것이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