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쯤 군인 한 명이 들어오더니 자기까지 일행이 세 명인데 건너편 고기집에서 밥 먹은 뒤 머리 깎으러 들를 테니 문 닫지 말고 기다려 달랬다. 반 시진이나 지났을까 아까 왔던 그 군인만 스윽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10분 뒤 일행으로 보이는 군인 한 명이 또 들어와 머리 깎을 순서를 기다렸다.
먼저 온 군인은 좀 까다롭게 굴었다. 윗머리 길이를 3cm에 딱 맞춰 달라는 거였다. 머리 질로 보건대 원하는 주문대로 깎게 되면 깎으나 안 깎으나 별 표가 안 날 성싶게 무게감이라고는 없이 날리는 머리카락이라서 두발 단정하다는 소리를 듣자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깎아 주는 게 맞지만 굳이 30cm 자를 들이대면서까지 원하는 대로 해줬다. 군인이 멋을 부려봐야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계급장을 보니 병장이었다.
뒤에 들어온 군인과 몇 마디 주고받던 먼저 들어온 군인은 제 볼일 다 봤다는 듯이 홀연히 점방을 나갔다. 뒤에 들어온 군인은 의자에 앉자마자 복귀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 깎아 달라며 재촉했다. 부대 마크가 53사단이었다. 그 부대라면 사령부가 있는 해운대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여기서 머리를 깎고 복귀하는 길이 꽤나 급하겠구나 싶어 내가 더 급해졌다. 내 점방에서 해운대 우리집까지 1시간 거리다. 예전 군생활을 떠올려 보건대 휴가, 외박, 외출 후 복귀까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를 넘기면 안 됐는데 그때가 벌써 7시였으니 급할 만도 했다. 괜히 나 때문에 복귀가 늦어 영창 들어갔다는 원망 들을까 걱정이 앞섰다.
- 휴가 다녀왔나 보지요?
- 외출입니다.
- 외출이면 가까운 데서 동기들이랑 밥 먹고 한 잔 걸치다 들어가면 될 텐데 이 먼 개금까지 무슨 일로?
- 소속 부대가 이 주변이라서요.
- 여기에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고요? 가깝네. 그럼 복귀는 몇 시까지?
- 오후 8시30분까지 들어가면 됩니다.
- 에이, 괜히 걱정했네. 난 해운대까지 가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 7월 들어 간부들이 바뀌어서 눈치 보느라 좀 일찍 복귀하려구요. 3개월 후면 제댄데 괜히 책 잡힐까봐 복귀 전에 머리도 깎는 겁니다.
- 그럼 금방 나간 친구는 동기?
- 예. 간부들이 부대원들 두발 단속 중인데 윗머리 3cm 이내면 봐준대서 깎기 싫다는 거 억지로 맞춘 겁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년 병장의 심정을 모를 리 없다. 석 달 뒤면 민간인으로 돌아갈 몸인데 머리를 길러도 시원찮을 판에 두발 단속이라니. 새로 부임하면 기선 제압을 구실로 잡도리부터 하려 드는 신입 간부들의 성화가 아니꼽지만 옹졸하게 버티다 말년에 꼬이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밖에. 적당히 비위 맞춰 주다가 무탈하게 제대하는 게 상책이겠다.
- 난 군생활을 27개월 했지만 27개월이나 18개월이나 짬빱 먹을 시절은 다 고생이라우. 우짜든동 몸 성히 제대하길 바라오.
- 27개월이나 하셨어요? 어휴, 저라면 지레 말라 죽었을 겁니다. 어떻게 견디셨어요?
아닌 게 아니라 2년이 안 되는 복무기간에 월급으로 목돈 만들어 제대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세상 참 좋아졌다는 걸 느끼긴 했다. 27개월 복무기간을 꽉 채우고 사회로 복귀하니 찐따가 된 기분이었다. 27개월이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니 세상이 상전벽해했을 리 만무하지만 강원도 오지에 처박혀 더덕이나 캐 먹다가 개화한 세상 속으로 막상 내쳐지니 주눅부터 심하게 들고 몇 달 동안은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도 못할 만치 적응도 쉽지 않았더랬다. 나는 확신한다. 군생활을 어디서 했는가에 따라 전역 후 세상과 마주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걸. 그런고로 18개월을 부산이라는 대도시 한 복판에서 군생활을 즐긴 이라면 제대 후 나모양 어리바리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원하는 대로 깎아 주되 3cm 이하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가 이를 증명한다.
다음 날 아침 마수걸이는 경북 영천에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늙수그레한 손님이었다. 경북 영천이래서 3사관학교를 들먹거렸더니 잘 아는 눈치였다. 3사관학교와 인연이 또 깊다 내가. 학군단 후보생 시절, 3~4학년 연거푸 여름 한 철을 3사관학교에서 병영훈련 받느라 생고생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덥다는 그 곳에서 그것도 여름 한 달을 꼬박 훈련으로 났으니 기억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 염색 발라 놓고 시간도 죽일 겸 노닥거리다가 제대 석 달 앞둔 군인들 얘기를 했더니 대뜸 이런다.
- 18개월? 27개월? 나는 36개월 했시다.
어디서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