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

by 김대일

제임스 조이스가 쓴 「애러비」의 내용이다. 주인공 소년은 좋아하는 누나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고군분투하지만 바자회가 폐점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사지 못해 절망하던 그때, 바자회의 가게 여자 점원과 신사들이 주고받는 실없는 음담패설을 듣고 전율한다. 세상은 소년의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소년은 사랑이라는 놀라운 감정의 세계에 처음 눈을 떴지만, 그 앞에 펼쳐진 길은 어둡고 불길할 뿐이다.

"그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나는 허영심에 내몰리고 조롱당한 짐승 같은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눈은 고뇌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최재봉 기자는 첫사랑 이야기가 문학작품에 반영된 예를 조목조목 드는 중에 「애러비」 대목에서 에피파니를 들먹였는데 난생 처음 접하는 개념에 내 눈길이 확 쏠렸다.

사랑의 흥분과 고양감이 급격하게 가라앉으면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환멸을 통한 깨달음과 성장의 이 결말은 '에피파니'라는 개념으로 문학사에 등재됐다.(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 <최재봉의 탐문-첫사랑>, 한겨레, 2022.07.20.에서)

에피파니epiphany에 대해 더 알아봤다. 에피파니는 그리스어로 '드러나다'란 뜻이란다. 원래는 종교적으로 신의 출현, 현현顯現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작품을 통해(물론 에피파니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진 않았겠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직관적으로 깨닫는 갑작스러운 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제시한 의미에서 내가 방점을 찍은 건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이라는 부분이다. 좀 지난 글이지만 옮겨 본다.

즉, 6·25 전쟁이나 나치 홀로코스트를 통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인류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아니라, 저녁 반찬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하다가 쌀통에 쌀이 없는 걸 보고 “아, 내가 쌀도 없는 주제에 반찬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닫는 정도랄까. 물론 이 깨달음은 일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제까지의 편견과 무지를 박살낼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 내가 가난한 이유는 주제파악을 못해서였구나”까지 깨달음이 확장되어야 에피파니다. 또한 그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아!”보다 더 느닷없는 감탄사 “흐미!” 정도는 붙어야 에피파니다.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구 ‘하이쿠’야말로 에피파니를 위한 에피파니에 의한 에피파니의 시 아니겠는가.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느닷없고 너무 명쾌해서 심지어는 이 지면에도 실을 수 있다. “아이들아, 벼룩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었으니.” 뭐 이런 식으로 일상의 디테일로 ‘니주’를 깔다가 느닷없이 생로병사의 거대한 주제를 들이미는 “흐미!”스러운 현현.(김선 영화감독, <곡사의 아수라장-갑자기 나타난 노루와 만나다>, 씨네21, 2014.08.22.에서)

무수히 많은 에피파니와 직면했음에도 깨달아야 할 때 깨닫지 못한 탓에 요 모양 요 꼴로 사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문학을 공부했다는 국문학도 출신이 에피파니를 여직 모르고 살았으니 오죽할까. 헌데 요상하다. 에피파니를 염두에 두지 않은 제임스 조이스이듯이 나 역시 에피파니의 '에'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주야장천 천착하고 그 일상 속에 포착되는 미시적이되 결정적 순간에서 신박한 무엇을 건져내 보려고 아득바득 수작을 떠는 건 무슨 까닭일까. 혹시 내 미련하고 아둔했던 지난날을 뉘우치려는 몸부림은 아닐는지.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적인 에피파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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