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양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다. 즉 '양화量化'될 수 있다. 예컨대 베르그송 말대로 시간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면서 변이하는 흐름이고 '순수지속'이지만,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시계바늘의 공간적인 양을 통해서 '양화'될 수 있다(『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지적 능력은 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점수로 지표화되는 성적을 통해서 양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있게 된다.(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126쪽)
시간에 관해서 유독 강박적인 나는 위의 인용글이 맑스의 『자본론』을 논리적으로 해설하기 위한 장치로써 저자가 끌어다 쓴 것임을 알면서도 유한한 시간의 속성을 극복해 일 분 일 초도 허비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후회없이 누릴 '어떻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아포리즘쯤으로 받아들인다. 어릴 적 방학을 맞이하면 맨 처음 그리는 건 생활계획표였다. 하루 단위 계획표, 한 달 남짓 되는 방학의 월간 계획표. 그걸 떠올리면 시간은 양적으로 세거나 잴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양적으로 세거나 잴 수 있다는 건 양화된 시간을 마치 장난감인 양 깜냥껏 다룰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럼 '시간이 없다'란 표현은 터무니없이 들리고 대신 '시간을 쪼개는' 수완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양화된 시간, 아니 유의미한 가치를 장착한 양화된 시간을 촘촘히 쌓아 나가다 나의 마지막에 임박한다면 구차하게 '여한'을 구걸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느긋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을 씨부렁거리고 자빠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부분만 읽고 또 읽다가 생각만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