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기하지 말기

by 김대일

서른 넘어 마흔 먹어서까지 돈 빌려달라고 손 내밀고 다닐 때 입바른 사람들은 아직 늦은 나이가 아니니 개과천선하라며 으르고 달랬다. 오십 줄에 이르러 하꼬방이나마 내 점방 차릴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일 만큼 아직 시간과 체력에 여력이 있어서였다. 재기를 할지 말지가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때를 놓쳤거나 알고도 방기했다면 여생은 지금보다 파국적일 게 뻔하다. 우리 또래는 실기失期하면 치명적이니까.

고등학교 동기인 H는 십여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실낱같은 연줄만 있어도 매달려 급전을 구걸할 만큼 비루할 무렵 억대 연봉을 구가하던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우럭 요리 전문점을 차려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부산의 환락가인 서면 복개천 주변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노래주점, 룸살롱에 기생하는 일종의 바지사장으로 변신한 게 우럭 팔아 버는 돈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확신에서 기인한 바라면 말이 좋아 사장이지 손님들 호객해 나오는 술값의 얼마를 떼어 받는 삐끼 노릇이라고 한들 직업의 귀천을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가기 전 용이가 같은 값이면 친구네 술 팔아줘야 한다면서 한창 밤일에 재미를 붙인 녀석의 뒷배 아닌 뒷배가 되어줄 때 몇 번 따라갔지만 갈 적마다 나로서는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일천하나마 먼저 경험해본 자의 입장에서 술장사라는 게 그리 오래 할 일이 못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돈벌이라는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걸고 환락의 불야성에 복속된 채 스스로를 미몽의 감옥에 가둔 듯한 답답한 인상을 받아서였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댔다고 우럭 판 돈보다 더 많이 벌어 호의호식하면 그만이겠으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시간, 건강, 가정의 행복, 일의 보람…,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뭔가가 줄줄 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 토요일 H한테서 연락이 왔다. 용이 인도네시아 떠난 이후로 못 봤으니까 사오 년 만이었다. 근황은 어두웠다. 역병이 돈 이후로는 밤일은 개점휴업 상태고 최근에는 통풍까지 와서 고생이 자심했단다. 녀석의 의기소침해하면서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미루어 처량한 신세를 전하려고 부러 연락한 게 아니라는 눈치쯤은 금방 챘다. 다음 달에 갚을 테니 30만 원만 꿔달라고 했다.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도 했다. 전날까지 번 돈이 수중에 있었지만 줄 수 없었다. 오천 원짜리 손님 수십 명의 머리를 깎아 번 다음 달 내려고 쟁여둔 월세였다. 아니 주고 싶지 않았다. 돈을 빌려주면 그간 어렵게 다져온 내 삶의 방향성이 순식간에 틀어질 것만 같고 고통스럽더라도 냉정하게 자기응시를 해야 할 녀석에게 미봉책의 독사과만 던져 주는 꼴일 성싶어 매정하게 사양했다.

제발 실기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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