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by 김대일

옥천 <월간 옥이네> 하니까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이 있다.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잡사를 일정한 틀에 맞춰 재구성한 뒤 정기적으로 공동체 일원들에게 소개하자면 요즘이야 SNS를 활용한 소통 도구 하나면 되지만 인터넷이 생소하던 1995년 3~6월에는 A4 용지 대여섯 장을 포갠 약식 잡지가 이목을 끌었었다.

199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3개월 군사 교육을 받으러 입소한 곳은 전남 장성으로 옮겨 새롭게 단장한 상무대. 배치받은 사단이 같은 인원끼리 모아 부대화시켜 함께 소대장 교육을 받고 숙식도 해결하게 했다. 내 기억으로 당시 12사단 배치 보병 장교가 백 명이 채 안 됐는데 이들을 네 명씩 묶어 한 방을 쓰게 배정했다. 그해 소위로 임관한 전국 ROTC 대부분이 상무대로 집결하다보니 특이하고 별난 동기가 없으면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내가 속한 방에는 나 말고도 부산 동아대, 전주 전북대, 서울 연세대 출신 동기가 3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다. 그중 연세대 동기는 애리애리하고 뽀얀 살결에 소년 티가 팍팍 묻어나는 게 상무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경영학을 전공했다길래 서울 깍쟁이의 전형이 따로없겠다 싶어 처음에는 경원시했다. 제 앞가림만 중히 여기는 얄미운 녀석일 줄 알았는데 좀 지나다 보니 기특한 구석이 많은 재주꾼이었다. 은근히 학벌의 우열로 친소를 정하는 동기들이 없지 않았는데 특히 SKY 출신들이 고약한 티를 냈다. 헌데 그 녀석은 동기 누구에게나 똑같이 친절하게 대했고 능글맞게 굴었다. 어울리는 데 부담이 전혀 없으니 상대방도 녀석을 마치 오래 사귄 친구인 양 허물없이 대해줬다. 그러자 녀석은 혹시 재미나고 특별한 뭔가를 감지했다 싶으면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악착같이 묻고 귀담아 들으며 열나게 메모를 해뒀다. 더 나아가 숙식하는 건물을 밤낮없이 쏘다니며 화젯거리를 물색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하라는 군사학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A4 용지에다 뭔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그리기 일쑤였다. 몇 장에 걸친 작업이 끝나자 녀석은 공지사항을 걸어두는 알림판(보통 통제실 가까운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고로 훈육장교의 공간인 셈이다)에 떠억하니 전시하는 게 아닌가. 별 거 아닌 내용이지만 아기자기했다. 결혼하고 임관한 아무개 동기의 부인이 임신을 했는데 임신임을 알리면 휴가를 낼 수 있냐고 아내가 문의를 했다는 둥, 아무개 훈육장교가 상무대 내 아무개 여군과 얼레리꼴레리 사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둥 민완 기자 뺨을 치고도 남을 재빠르고 엉뚱발랄한 이야기들로 그득했다.

고압적이고 엄숙해야 할 부대가 학교 동아리마냥 날리는 분위기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훈육장교들의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는 우리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전무한 사건이긴 하나 부대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보다 끈끈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함은 물론 그 내용의 유쾌함 덕분에 강도가 여간 아닌 훈련 중에 정신적 이완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아래 훈육대장이 묵인해줬다. 판단은 그대로 적중해 우리는 한결 부드럽고 순하게 부대 내 생활을 영위했던 게 사실이다. 6월 말 상무대를 퇴소할 때까지 녀석의 잡지 발행은 이어졌다. 같은 방을 쓴 덕분에 나는 녀석의 작업을 거드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녀석은 다 쓴 원고의 교정을 내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눴건만 2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이르러 잡지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 녀석의 이미지만 어렴풋할 뿐 녀석의 이름도, 밤을 수놓았던 수많았던 이야기도 기억이 전혀 없다. 내 무심함의 끝은 어디일까. 녀석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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