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 바르면서 커트는 안 하겠냐고 떠봤다.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아무리 봐도 내 부친보다는 아래로 터울이 져 보이는 로맨스그레이가 안 그래도 해명할 작정이었다는 듯 내 말꼬리를 냅다 채어 갔다. 뻗치는 머리카락이라 영 보기가 싫어서 두 달에 한 번 단골 미장원에 들러 펌을 한다고 했다. 염색은 그동안 주욱 해주던 안주인이 귀찮기도 하고 용돈벌이가 생겨 시간도 안 나니 염색방에나 가서 하래서 여기에 이렇게 염색보 두르고 앉아 있노라 사정을 늘어놓았다. 미장원 펌은 얼마냐고 물었더니 3만 원이래서 부담스럽지 않냐고 또 떠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로맨스그레이가 누리는 안온한 노년의 삶에 대한 공치사였다.
개인택시를 몬 지 9년 됐다. 한때는 사업이니 장사니 해서 큰돈도 만져 보고 사기를 당해 뼈아픈 실패도 맛보는 파란만장한 역정을 거쳤다. 그러다 불현듯 마음 편히 여생을 즐기자면 무얼 하면 좋을지 고심하던 차에 개인택시가 떠올랐다나. 자격 조건에 부합하려고 3년 간 화물차를 몬 뒤에 장사한답시고 벌여 놓았던 사무실, 물건 다 처분하고 남은 돈 1억으로 개인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지리에 어두웠던 초창기에는 길도 모르면서 개인택시를 모냐는 비아냥을 듣기 일쑤여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만치 노련해졌다.
개인택시 영업에 있어 자신만의 철칙이 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식사 전에는 운행을 종료함으로써 밤 늦게까지 무리하는 짓은 절대 피한다는 것. 취객들과 실랑이로 스트레스 받느니 돈 안 버는 게 신간이 편하다. 또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일요일 쉬는 날은 무조건 즐겁게 놀기로 한다. 술을 좋아하니 노는 목요일 전날은 일찍 퇴근해 친구들과 어울려 마시고 놀면 술맛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 등산을 또 좋아해서 노는 날마다 산수유람이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 회를 유독 좋아하는 안주인을 위해 단골 횟집에 예약을 걸어 둘만의 오붓한 저녁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이 대목에서 살짝 매료됐다. 노년의 외식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유유자적해질 수 있냐고 물었다. 아니 그런 일상을 감당할 만큼 당신은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냐고 물었다. 주간 운행해서 벌면 얼마를 벌겠냐고 되물었다. 기껏해야 100만 원, 많이 벌어야 150만 원. 거기에 연금을 합치면 월 250만 원 가량. 사위가 이뻐 돈까지 대주는 처갓집을 둔 아들내미 둘 다 제 집 마련해 따로 나가 살아 자식들 밑으로 돈 들어갈 일도 없으니 그 돈이면 노부부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이 여생을 남부럽지 않게 편히 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니 로맨스그레이가 마냥 부럽지만은 않다. 하지만 볼일 다 마치고 점방을 나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를 기준으로 삼아 나의 안온한 노년을 재미 삼아 그려봤다. 깎새를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작정했으니 늙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개인택시 모는 일이나 별반 차이가 없겠다. 나 역시 새벽에 출근해 저녁은 집에서 먹는 편이니 일하는 방식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느긋하게 일상을 즐길 만큼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점은 취약하다. 점방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아직 미약하고 나라에서 주는 연금 제대로 받으려면 소싯적에 못 냈던 보험료를 전부 불입해야 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아무리 사위가 이뻐도 두 딸의 배우자를 위해 집 살 목돈을 내주기는커녕 딸애들의 결혼 밑천 대기에도 현 상태라면 빠듯하다. 정기적으로 만나서 맛난 술을 마시고 즐길 친구들은 별로 없고 취향, 기질이 안 맞는 마누라와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는 건 그 자체로 큰 도전이라고 여기는 나는 과연 로맨스그레이처럼 안온한 노년을 즐길 수 있을까.
개인택시 모는 로맨스그레이를 평균적인 노년상이라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소시민적인 바람이 아니라고도 말 못 하겠다. 그 정도 여건을 갖춰야지만 안온한 여생을 담보할 수 있다면 노후의 나는 이미 절망적일까. 꼭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그 여건의 충족 여부를 판별하는 게 보편적이라면 나는 차라리 전복적인 노후를 꿈꾸는 반항아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만의 안온한 여생이 무엇일지 심각하게 다가오는 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두려워해야 할 나이가 됐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