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61.5%의 반대로 김건희 논문 재검증을 하지 않고 조사위원회 조사자료 공개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한 국민대 교수회의 행동을 꼬집은 칼럼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표절 범죄를 용인, 방조, 은폐를 서슴지 않은 국민대 교수들 다수가 선택한 행동은 집단 지성이 아니고 집단 지식일 뿐이라며 집단 지식의 행동을 세 유형으로 나눴다.(<정동칼럼-집단 지식만 있고 집단 지성은 없다>, 경향신문, 2022.08.29. 내용 중 발췌해 내 의견을 약간 달았다)
첫째, 견리망의見利忘義(이익 앞에서 의를 저버림).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유형으로, 기회를 엿보다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기회주의자도 여기에 속한다. 국민대 투표에서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이를 지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표절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고 이것을 단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취하려 했다. 이 유형의 학자는 곡학아세(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함)의 위험이 있다. 정 교수는 은폐를 선택한 61.5%의 교수 중에서 이 유형이 가장 적기를 바랄 뿐이랬지만 내가 봐서는 가장 많을 성싶다. 대학은 지식 모리꾼으로 득시글거리는 장터 마당으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됐으니까.
둘째,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가는 구명도생苟命徒生형이다. 알면서도 권력이 두려워 행하지 못하는 소심형이다. 대세를 따르기는 하지만 기회주의자와 달리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물론 무기명 비밀 투표에서조차 소신을 밝히지 않은 것은 구명도생이 의식적으로 작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차스럽다'는 '떳떳하지 못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난하여 궁색하다'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용기가 부족한 소심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호령하는 치들 치고 용감한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학문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비겁한 종이호랑이 무리. 대체로 기회주의적인 것들이 비겁하기 마련이다.
셋째,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 계책을 꾸며내는 고육지계苦肉之計형이다. 궁지에 몰려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책을 따르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사로운 정보다 공정한 법 집행을 행하는 읍참마속과는 다르다. 김건희 논문의 표절을 파헤쳐 들어가면 줄줄이 나올 다른 비행과 불명예를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유형은 약간 이타적이면서 지적이기까지 해 간사한 모리꾼이 득세하는 장터 마당에서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두 유형이 전부임에도 역시 교수인 필자가 일종의 퇴로의 명분을 삼기 위해 의도한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아니나 다를까 칼럼 후반부에 필자는 둘째와 셋째 유형의 개심을 기대했다.
사회적으로 교수 집단은 기득권층에 속한다. 혁명의 고조기에 교수 사회의 다수는 마지막에 나타나 동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교수도 항상 있었지만 언제나 소수였다. 그러나 이 소수의 목소리가 울리는 파장은 크다. 적어도 둘째와 셋째 유형은 늦게나마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위 칼럼)
지식 모리꾼들이 판을 쳐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대학을 소수의 지성이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넌센스고 참으로 순진무구하다. 샌님은 역시 샌님일밖에. 신자유주의라는 마약에 지독하게 중독된 지식 모리꾼들은 절대로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표절 범죄의 용인, 방조, 은폐 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을 게 분명하다. 대학이라는 위상의 방패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공고한 까닭이다. 하여 이 칼럼은 참으로 공허하다. 하여 이런 반성문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알던 대학은 죽은 지 이미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