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일요일(63)

by 김대일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ㅡ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ㅡ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ㅡ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겄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내가 오탁번 시인을 이리 좋아하는 줄 몰랐다. '시 읽는 일요일'에 등장한 63편 중에 오늘까지 4편이 그 시인의 시이기 때문이다. 딱 내 스타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시어는 읽기 수월하고 의미는 직관적으로 착 감기며 무엇보다 익살스럽다. 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우울한 놈이 웃기고 재밌는 걸 더 찾는 법이다.

여담인데, GOP 근무하던 1996년 한겨울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1,500 고지 산꼭대기 막사 지붕이 밤새 내린 눈으로 폭삭 주저앉을 판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점잖은 편인 소대장이던 내가 경악하며 한 마디 했다. "씨발,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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