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평안하신지? 지금 시각 08시 29분. 장산 역에서 출발하는 2호선을 타고 점방으로 향하는 중이다. 내 온 신경은 사인볼(회전간판)에 매달려 있다. 가보면 알겠지만 제발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초면인 손님이었다. 염색은 해야겠는데 머리가 가렵다고 호소했다. 한방 재료가 들어간 염색약이 좀 덜 가려운 편이라고 추천했더니 덥썩 발라 보겠댔다. 염색약을 한참 바르고 있는데 앞거울에 붙여 둔 역시 한방 재료가 들어간 샴푸의 광고 문구를 유심히 보던 손님, 효과가 있냐고 물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 달라서 효과를 봤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영 아니올시다 손사래치는 사람도 없지 않아서 무조건 좋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몇 년 간 주욱 애용 중인 나로서는 아예 별무소용이면 이렇게 계속 쓸 이유가 없지 않겠냐는 대답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잠깐! 그 한방 샴푸에 관해서 부연하자면, 10여 가지 생약초를 원료로 해서 만들어서 탈모, 비듬, 가려움증, 지루성 두피염증, 민감성 두피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됐다고 점방에 붙여 놓은 광고문에는 적혀 있다. 오래 전에 샴푸 판매업자와 인연이 닿은 부친은 샴푸와 토닉(그게 한 세트란다)을 정기적으로 싼값에 떼어 와 점방에 비치해 두고서 탈모나 두피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손님들한테 팔았는데 부수입으로 짭짤했다. 샴푸 판 돈으로 염색약, 비품 따위 점방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거나 가끔 별식으로 중국집 요리를 직원이랑 시켜 먹곤 한다. 개업 준비로 한창일 때 나한테도 그런 쏠쏠한 재미가 필요하다면서 점방 서랍장에다 우선 다섯 세트를 욱여 넣어 주셨다. 거기에 더해 비치만 해둔다고 팔리는 게 아니고 선전도 과감하게 해야 한다면서 샴푸 판매업자한테 부탁해 홍보물을 받아다가 점방 안의 거울, 벽면 할 거 없이 붙이게 했다. 만약 손님 쪽에서 그걸 보고 조금이라도 동한 눈치면 효과 검증이 끝난 탁월한 제품이라는 과장 광고도 입에 거품을 물고 씨부리는 요령이 필요하다고도 당부하셨다. 다년간에 걸쳐 그 샴푸를 써 본 유경험자로서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해도 그렇다고 '탁월하다'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부친 점방에서는 정기적으로 그걸 찾는 사람이 제법 되는 걸 보면 몸에 맞는 사람한테는 그 어떤 유명 제품보다 톡톡히 제값을 하는가 보다. 문제는 한 통에 3만 5천 원(토닉은 5만 원)을 호가하는 샴푸를 천연덕스럽게 판매할 만큼 내가 그리 뻔뻔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점방 오른편으로 옆의 옆 페인트 가게 사장님은 두어 달 전에 머리를 깎으면서 자기가 지루성 두피염증이 심한데 마침 잘 됐다면서 샴푸 한 통을 사갔지만 그로부터 한 달 뒤 머리 깎으러 다시 와서는 효과가 안 나타나 괜히 샀다고 투정을 부려서 그 입 막느라 진땀을 뺐다. 쓰는 사람 족족 다 효과가 나면 만병통치약이지 그게 어디 샴푸겠냐고 둘러대긴 했는데 내가 강매한 것도 아니고 손님 마음이 동해 자발적으로 샀는데도 영 뒤가 구려 아주 혼났다.
아무튼 오늘 글의 주인공인 초면인 손님 역시 두피 가려움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양잿물도 마실 기세였다. 염색 바르고 기다리는 시간에 샴푸 이야기를 이어가던 도중 손님 폰이 울렸다. 근데 그 손님이 폰에다 대고 떠드는 소리가 귀에 설었다. 한국말은 전혀 아니고 마치 동남아나 남미 오지의 원주민이 쓰는 말인 양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발음으로 유창하게 상대편과 통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보고 아, 또 어쭙잖은 오지랖이 발동했다.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외국을 자주 나다닌댔다. 기업체 주재원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혹시 무역상이시냐 물었더니 안 그래도 자기 직업을 쉽게 설명하려던 참이었는데 적당한 표현이라며 반색했다. 말 물꼬가 트이자 무역상은 타국 생활의 애환을 털어놓았다. 특히 역병이 돈 이후로는 외국만 나갔다 하면 현지에서 자가격리로 묶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또 자가격리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자가격리만큼이나 고생스러웠던 게 두피 가려움증이라고 했다. 한번은 외국에서 염색을 했다가 머리가 가려워 몇 밤을 잠도 못 자고 식겁을 해 이후로는 머리에 관한 한 외제라면 다시는 사지도 쓰지도 않을 거랬다. 그러더니 이왕 속을 거면 한국 제품으로다가 속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다면서 내 점방에 있는 한방 샴푸 전부(그래봐야 네 통뿐이었지만) 달라고 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14만 원어치를 말이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편견이라는 건 과거의 어떤 시점에 무언가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나머지 개념이랍시고 고질화된 거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없고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 그 편향된 개념이 공고해진 뚜렷한 이유도 댈 수는 없지만, 무역상하면 나는 딱 두 가지만 떠오른다. 무모함과 배포다. 성공과 실패가 한 끗 차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거다!' 싶으면 앞뒤 안 재고 일단 지르고 보는 무모한 도전의식과 '못 먹어도 고!' 식의 두둑한 배포는 일종의 직업적 상징으로써 무역상을 대표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앞의 손님을 통해 대상화되기에 이르렀다! 물건 파는 입장에서야 많이 팔아 좋긴 하지만 효능이 어떤지 제 몸에 맞는지 하나쯤 써본 뒤에 결정해도 될 일을 너무 성급하게 구는 게 아닌가 염려까지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날은 머리 깎아 번 돈보다 더 많은 부수입이 들어와서 운수가 좋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