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야기와 이어진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아침 나절에 중년 부부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는 그제 그 무역상이었고 여자는 부인인 성싶었다. 무역상은 두피 가려움증이 싹 없어진 게 효과 만점이라면서 다짜고짜 그때 그거 다섯 개만 달라면서 5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내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일단 하나 써보고 나중에 몇 개 더 사자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속으로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한방 샴푸 다섯 개를 꺼내 담는데 어째 좀 이상했다. 다섯 개면 17만 5천 원을 줘야 하는데 달랑 5만 원이라니?
- 선생님, 일전에 사신 샴푸는 한 개 당 3만 5천 원입니다. 다섯 개면 17만 5천 원입니다.
- 그래요?
무역상은 알쏭달쏭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지갑을 꺼내 나머지를 지불했다. 이런 걸 두고 대목 특수이구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께름칙했다. 샴푸가 아무 때나 찍어 바르는 화장품도 아니니 암만 자주 쓴들 기껏해야 하루에 두세 번일 테고 샴푸 산 지 이틀 만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면 이런 변두리 커트점을 전전할 제품이 아닐 거이다. 무역상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자 샴푸 판 17만 5천 원은 내 돈이 아니다 싶어 돈통에다 넣지를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쟁여뒀다.
그러면 그렇지. 부부가 나가고 5분쯤 지났을 때 무역상 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편이 찾은 건 샴푸가 아니고 그제 발랐던 염색약이라면서 남편이 착각한 것 같다고 쭈볏거렸다. 그러면서 환불해 달라고 조심스레 청했다. 저간의 정황을 톺아보니 그림이 완연해졌다. 그제 그 한방 염색약으로 염색을 하면 염색 바르는 요금 7천 원 외에 약값 1만 원을 따로 더 받는다. 염색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머리가 안 가려운 게 신통했던 성미 급한 무역상은 머리로는 염색약을 지목하면서 입에서는 샴푸가 튀어나온 게 분명하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던 터라 흔쾌히 돌려주겠다고 대답하자 득달같이 무역상 부인이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에 한 번 단단히 꽂히면 앞뒤 안 재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미를 말릴 새가 없다면서 그러고 뒷수습은 가족 몫이라는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늘어놓는 무역상 부인한테 샴푸를 받고 돈을 돌려 주었다. 그냥 나가자니 미안했는지 남편 마음에 쏙 든 염색약 다섯 개를 사겠다고 추파를 던졌지만 아까 통화 상으로 말씀드렸듯이 재고가 없어 주문을 걸어야 하고 도착하기까지 며칠 소요되니 모레 출국이 예정되어 있는 남편분 일정에는 못 맞출 것 같다고 통화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해 설명했다. 아까 들었으면서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괜히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무역상 부인은 주문한 염색약이 도착하는 대로 꼭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 무역상 부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무역상이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닐진대 가족들 속을 엔간히 썩히겠다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고 자빠졌다. 별쭝맞은 오지랖이 병이라면 아주 몹쓸 병이다.
그로부터 또 1시간쯤 지났지 아마. 무역상 부인이 또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혹시 그제 산 샴푸까지 환불해 달라는 거면 당신 남편이 자발적으로 구입 의사를 밝히고 구매한 것이니 환불은 불가하다고 강단지게 거절할 작정이었다. 역시 부인의 입에서 '샴푸'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긴장하면서 기분까지 상해지려는 나.
- 샴푸 두 개만 주세요.
손님 머리 깎느라 바쁜 커트점 주인 붙들고 샀다 말았다 한 게 스스로가 봐도 너무 가오 빠지는 짓이라고 무역상은 창피해했을 게 뻔하다. 성미 급한 사람이 상황을 타개하자니 뾰족한 수라는 게 물량 공세밖에 없겠다 여겼을지 모른다. 염색약은 어차피 시일을 기다려야 해서 표도 안 나고 만만한 게 샴푸겠거니 싶었겠지. 생색을 내기에 다섯 개는 좀 많고 한 개는 영 없어 보여서 두 개로 낙착을 봐 체면치레하겠다는 심산이 깔린 게다.(부친에게 부탁해 샴푸는 급히 공수해서 재고는 충분했다.)
무역상 하면 무모함과 배포가 떠오르는 게 무슨 계기에서 비롯되었는지, 또 그것이 시멘트로 공구리 치듯 내 의식 속에 공고한 편견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두피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한 무역상이 밭떼기하듯 점방 샴푸를 통째로 사는 걸 보고 내 편견은 마침내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왕 샀으니 무역상한테 샴푸가 잘 맞았으면 좋겠다. 타국살이로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자심할 텐데 두피까지 말썽이면 나 같으면 울고 불고 난리가 아닐 게다. 모쪼록 샴푸와 조만간 보낼 염색약 덕에 타국살이의 고단함이 잠시나마 씻겨지길 바랄 따름이다. 몸에 잘 들어야 나중에 부산 오면 또 싹쓸이할 게 아닌가. 그럼 나야 매상 올라서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