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이 피네

by 김대일

어쩌면 생전의 마지막 부산 나들이일지도 모를 장모님 방문을 앞두고 마누라는 연휴 내내 대청소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제때 버리지 못한 묵은 것들을 치우는 일은 보기보다 성가시다. 예를 들어 몇 번 타지 않은 채 베란다에 십 년 넘게 방치해 둔 자전거 두 대나 아이들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될까 하고 들였지만 역시 거실 장식품으로 전락한 전기 피아노 따위는 내다버리더라도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했다.

아무튼 개천절 낀 사흘 연휴 내내 치우고 쓸고 닦은 덕에 집안은 몰라보게 너르고 깔끔해졌다. 연휴 마지막 날인 개천절 저녁 환골탈태한 거실 식탁에 앉아 염소처럼 풀을 뜯어먹는(다이어트는 현재진행형이다) 기분은 제법 상쾌했다. 그러다 식탁 한 켠의 포캣북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눈에 거슬린다 싶으면 일단 버리고 보는 마누라 성미에 낡고 변색된 포켓북이 목숨을 부지했다는 게 신기했다. 여기서 잠깐, 생물·무생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 쪽이다. 특히 지면 위에 나열된 활자에 지은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줄 아는 책에 대해서는 특히 더 민감하다. 하지만 마누라에게서 자비란 없다. 공간만 잡아 먹는 천덕꾸러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 포켓북은 살아 남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니 무슨 대수겠냐 싶었을까. 헌데 책 제목을 본 나는 결코 대수롭지 않은 책이란 걸 한눈에 알았다.

한번은 가까운 구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는데 수많은 책 중에서도 특별히 별도로 관리하는 목록이 있는가 보더라. 꽁꽁 숨겨 놓는 품이 꼭 국가 기밀문서를 보관하는 성싶었다. 그런 도서를 따로 추리는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법정의 『무소유』를 빌리는데 제법 까다로운 절차를 밟은 걸로 미루어 관리에 무진 애를 쓰는 건 확실해 뵀다.

『무소유』는 절판이다. 온라인 중고서점에서는 판매가의 수십 배를 호가한다. 기를 쓰고 그 책을 읽으려고 한 연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법정이 썼다는 책은 일반 서점 교양코너에 가면 흔전만전이었고 서울살이할 무렵 부산 내려가는 기차간에서 시간 때울 겸 서점 가판대에서 무심히 집어 산 포켓북이 집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는 걸 본 기억이 새록새록 나던 나이니 작금의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해하다 마침내 오기까지 발동한 건 맞다. 『무소유』가 주 타깃이지만 법정 이름자 박힌 거면 뭐든 좋다는 식으로 집념을 드러냈던 것이다.

엊그제 식탁에 올려져 있던 그 책은 다름아닌 집 어딘가에서 굴러다니던 포켓북, 법정 말씀을 류시화가 엮은 『산에는 꽃이 피네』(동쪽나라)였다. 마누라의 인정 사정 없는 폐기 처분 작업에서 비껴간 게 그 책의 요행이라면 요행이겠지만 『무소유』로 대표되는 법정의 사상에 진작에 매료되었던 나로서는 그 손바닥보다 작은 포켓북 속에 담긴 법정의 또다른 웅숭깊은 사유의 아우라 때문에 마누라가 쓰레기통에 함부로 던지지 못한 게 아닌가 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귀한 양서를 손에 쥔 뜻밖의 행운에 쾌재의 미소가 절로 나오는 걸 마누라한테 들키기 싫어서(뺏길까봐) 그길로 내 방으로 슬쩍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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