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와 비혼주의자인 네째 처형이 우리집에서 2박3일 계시다 어제 충북 음성 시골로 돌아갔다. 팔순 넘은 고령에 동선이 먼 거동은 힘들어 해운대 근처로만 도는 코스로만 즐기셨는데 마누라가 나름대로 살뜰하게 챙기긴 했다. 장인 생전에 두 분이 부산 오셨을 때 부친이 대접한 아구 수육의 맛이 생각났던지 부산 온 첫날 저녁 식사를 수영구에 있는 그 노포에서 먹자고 할 정도로 총기는 여전하신 장모. 비록 당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 뒷방 노인 신세로 전락한 서글픔이야 숨길 수가 없다 해도 특유의 낙관주의를 잃지 않고 세상의 숨은 즐거움을 더 게걸스럽게 만끽하려는 듯이 근자 들어 처형과 유람이 잦다.
평소에 직접 뵙지를 못해 마누라 편에 듣는 근황이 전부라 시골에서 들려오는 과장 섞인 요설들로 혼자 소설 한 편을 쓰고 자빠진 나는 장모가 휠체어가 아니면 옴짝달싹을 못하는 내 모친만큼 몸이 영 성치 않은 줄 알았지만 직접 뵌 기체氣體가 정정하기 이를 데 없어 여지껏 쓰잘데없는 군걱정만 일삼은 성싶어 한편으로 크게 안도했다. 그러니 일전에 내가 장모의 부산 나들이를 살짝 언급하면서 썼던 '어쩌면 생전의 마지막 부산 나들이일지도 모를' 이란 표현은 폐기해야겠다. 일정 맞고 여건만 닿으면 언제든지 부산에 들러 처가에서 제일 먼 데로 시집 간 일곱째 딸내미한테서 호강을 누려도 될 만큼 끄떡없으시다고 2박3일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니까.
세상을, 인생을, 가족을 대하는 방식을 내 부모님과는 또 다르게 제시한 장모와 생전 장인, 두 노친네에게 내가 진 마음의 빚은 엄청나다. 부모라면 본가, 처가 따질 것 없이 죄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장인, 장모께서 보낸 성원에 보답은커녕 외면만 일삼던 내 불충이 워낙 씻을 수 없는 과오라 불쑥 떠오르면 짙은 회한만이 끝 간 데 없이 짓누르곤 한다. 언제고 장모와 돌아가신 장인을 기억하는 글을 써 용서를 구한다면 두 분은 받아들이실까. 어제 새벽 출근하는 나를 배웅하던 장모께 작별인사를 고하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감정을 쉽사리 가누지 못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