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이 음악을 듣고 있길래 엿들었더니 귀에 무척 익은 노래다. 손에 꼽을 애창곡이라는데 음악적 취향이 요즘 애들 같지 않아 좀 놀랐다.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에서 유래했다는 '슈가맨'은 이제는 활동을 안 하는(혹은 못 하는)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가수를 현재로 소환해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TV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에 출연했던, 설령 TV에 재등장했다고는 하나 중3짜리가 홀딱 빠지기에는 음악적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여행스케치'의 <옛 친구에게>가 자기 플레이리스트 최상위권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에 아비는 동질감을 넘어 묘한 감동으로 전율한다.
'여행스케치'는 아비의 젊은 날을 낭만의 감수성으로 충만케 했던 가객 중의 하나였다. <슈가맨>에 나와 불렀던 여러 유명 곡 말고 원년 멤버이면서 현재까지 팀을 이끄는 남준봉이 해외 유학을 떠나기 전 석별의 정을 나누려 만든 「여행스케치 5집 남준봉」을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는 고릿적 얘기를 들려줬다(막내딸은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진다'는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부연하느라 애를 먹었다. 카세트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설명해야 하는 수고부터 겪었지만).
내친김에 아비의 대학 시절, 원통인 곳에서 원통해서 못 살 뻔했던 군 생활, 전역 후 서울에서 엄마와 결혼하기 전 총각 시절에 이르기까지 귀가 닳도록 듣던 아비의 플레이리스트를 조목조목 읊었더니 녀석 기특하게도 흥미롭게 경청했다. 예를 들어(괄호 안은 그 앨범에서 찜한 아비의 애청곡임) 「이소라 1집」(처음 느낌 그대로), 「일기예보 2집」(떠나려는 그대를), 「더 클래식 2집」(여우야) 따위를 유투브를 뒤져 틀어 놓고는 그 노래에 얽힌 하찮기 짝이 없는 추억 부스러기를 만지작거렸는데 다시 말하지만 막내딸 신통하게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잘 받아 주면서 노래까지 열중해서 듣는 게 아닌가.
갈수록 태산이라고 마누라를 만나기 전 1년 가까이 교제를 했지만 남자의 순정을 무참하게 짓밟고 잠적해 버린 독한 서울여자를 원망하면서 서울 강남을 배회하던 중 당시 타워 레코드에서 흘러 나오던, 청승맞은 목소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영은의 1집(순전히 내 주관적인 판단이니 서영은 팬은 절대 딴지를 걸지 마시라)에 꽂혀 그간 응어러가 진 설움이 폭발해 당시 얹혀 살던 평촌 막내고모 아파트의 내 방 문을 걸어 잠그고 몇 날 며칠을 그 앨범 수록곡 전부를 듣고 또 들으면서 울고 자빠졌던 흑역사까지 신나게 떠들어대고서야 아차, 막내딸 표정을 살폈는데 그게 또 묘했다. 얼마나 대단한 팜므 파탈이관대 소싯적 아비를 폐인 직전까지 몰아갔는지 그 정체가 궁금해 미치겠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눈물샘 밸브를 아작낼 정도로 「서영은 1집」이 자극적인지 어디 한번 들어 보자는 심산이기도 한 표정 같기도 하고.
아비의 장황한 나레이션에 그러구러 맞장구를 친 막내딸의 속내를 속속들이 알 순 없지만 들려주는 노래의 멜로디에 제 목소리를 얹어 곧잘 흥얼거리는 품이 영락없이 아비의 젊은 날을 닮았다. 발가락도 닮았는지 새삼 쳐다보는 아비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