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단골

by 김대일

영화로도 유명한 전라도 곡성이 고향이라는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은 커트와 일반염색 요금보다 두 배나 비싼 고급염색(그래봐야 15,000원이지만)을 매달 거르지 않는 귀한 단골이었다. 부산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구수한 전라도 억양을 구사하는 노인은 한때 건실한 회사를 운영했나 본데 십여 년 전인가 몸에 이상을 느껴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폐암 3기래서 그길로 하던 일 다 접고 치료와 요양에만 몰두했다. 서울 유명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를 꾸준히 받은 덕에 다행스럽게 몹쓸 암세포는 떨어져 나갔지만 재발을 염려해 주기적으로 서울 병원에 가서 몸 상태 체크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에 친구들과 부산 맛집을 순회하거나 등산, 여행으로 소일하는 일상은 여유로워 보이거니와 내 점방에 와서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게 뭔지를 여실히 보여주곤 했다. 한번은 팁을 줬는데 살짝 멋있었다. 그가 계산대에 와서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고 나는 커트와 고급염색을 합한 요금 2만 원을 제한 3만 원을 거슬러 줬다. 거스름돈을 받아 지갑에 넣는 듯하다가 만 원짜리 한 장을 나한테 도로 건넨다. 그러고는 "다음달에는 더 잘해 줘잉" 한 마디 던지고 뒤도 안 돌아보고 점방 문을 나섰다. 팁도 팁이지만 염색 글자 앞에 붙은 '고급'이 부담스러워 7천 원 하는 일반염색이 대부분인 점방에서 일부러 고급염색을 애용하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큰 팁이자 보탬이다. 넉넉하고 느긋한 노인의 행동거지에서 가진 자 특유의 오만함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만나면 상대방을 흐뭇해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손님으로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두어 달이 훨씬 지났는데 노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택이 내 점방 부근이라 했으니 오다 가다 마주칠 법도 한데 종적이 묘연하다. 노인 얘기를 꺼냈더니 부친은 "나많은 손님이 소식이 감감할 때는 두 가지 이유뿐이다. 죽었거나 병 들어 입원했거나!"라며 내 궁금증에 쐐기를 박았다. 부친의 단정이 제발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의 병력을 미루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 단골 한 사람 떨어져 나간 아쉬움 때문이 아니다. 손님 중에 상대를 들뜨게 만드는 기운을 몰고 다니는 이들을 간간이 본다. 그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점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을 상면할 적마다 나는 무척 설렌다. 그들의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소제하고 새치를 탐스러운 흑발로 변모시키고 나면 일에 대한 보람이랄지 희열같은 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장사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줘서다. 나에게 그런 생기를 넣어 주는 사람이 자취를 감췄을 때 밀려드는 상실감은 의외로 크다. 급성 백혈병으로 3년을 투병하다 작년 6월에 갑자기 하직한 친구 L의 부고 소식에 한동안 망연자실해 하던 내가 떠오른다.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고 싶다. 차라리 내 점방보다 요금이 싸고 서비스까지 좋은 이쁘장한 여자 원장이 운영하는 커트점에 꽂혀 발길을 옮겼다고 여길란다. 그래야 내 맘이 한결 편하겠다. 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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