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여행

by 김대일

초로의 부부가 여행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의 퍼머로 웨이브가 진 머리 염색을 주문했다. 말투로 미루어 동네 주민은 아닌 성싶었다. 나른한 월요일 오후에 오지랖이 발동 안 할 내가 아니다.

부산 분들이 아니신 것 같다고 운을 띄우자 언제 물어보나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 되는 여자가 미국 워싱턴주에서 산 지 50년이 다 되어 간댔다. 이 시기 미국 동부는 어떻느냐고 미국에 대해 뭘 좀 안다는 듯 물었더니 염색보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남편이 내 무지를 방관해선 아니 되겠는지 대화에 끼어들더니 워싱턴 D.C 말고 워싱턴 주는 미국 서부에 위치하고 시애틀이란 도시로 유명하다고 명토를 박았다.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본사가 자리잡고 있고 보잉 공장도 시애틀 주변에 있으며 특히 시애틀은 스타벅스의 고향이기도 하다며 들으면 알 만한 회사 이름들을 속사포마냥 주워섬겼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배경 도시이자 교타자인 스즈키 이치로가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 소속팀이었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연고지쯤 안다고 대꾸하려다가 비아냥대냐고 대거리할까 두려워 말았다.

화제를 돌려 부산은 어쩐 일이시냐 물었더니 해운대 센텀시티 쪽 호텔에 여장을 풀고 부산 맛집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넷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이라 개금 주변에 눈에 띄는 맛집을 검색해 찾았는데 점방 문을 오후 4시 이후에 연대서 대신 근방의 칼국수로 유명한 점방에서 점심을 때우고 나오던 길이었단다. 안 그래도 남편 새치가 자꾸 눈에 거슬리던 차에 내 점방이 보여서 그냥 들어왔대나 어쨌다나. 요금 저렴한 건 미국에서 오래 산 교포들한테도 금방 어필이 되나 싶어 속으로 우쭐해했다.

한국 들어온 지 얼마나 됐냐 물었더니 두 달 반이 넘었고 12중 중순까지 체류할 예정이랬다. 그동안 제주도를 유람하고 강원도 동해안을 일주했으며 통영, 마산, 진해 남해안도 구경했단다. 며칠 뒤 패키지여행으로 전라도 일주 계획이 잡혀 있다고도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산 말투가 아닌데 부산을 속속들이 잘도 구경하고 다니신다고 추켜세웠더니 남편은 서울 출신, 아내는 부산 서면 출신이라 아내 옛날 추억을 길라잡이 삼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해서 그러면 그렇지, 아귀가 드디어 맞아 보였다. 서면에서 개금이면 지척이고 아무리 맛집 탐방이라도 이 동네까지 들쑤시자면 부산 지리에 어지간히 밝아야 가능하니까 말이다.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이번 방한이 처음은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2017, 2018년 연거푸 고국을 찾아 이름난 곳을 유람하고 맛집을 찾아다녔지만 역병이 돌고부터 근 3년은 발이 묶여 있다가 마침내 올해 다시 찾아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아내는 눈시울까지 살짝 붉어지는 눈치였다. 노년에 부부가 팔도유람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지만 매년 몇 달씩 체류할 정도의 경제적 여건이 마런되지 않으면 그리 하고 싶어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데 두 분은 참 넉넉하게 모아두셨나 보다며 부러워하자 남편이 오늘의 명언인 양 "젊을 때 호의호식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이 들어 잘 먹고 잘 쓰는 게 진짜 남는 건데"라며 서울 말투로 거들먹거리는 듯했다(열등감에 사로잡힌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닌데 한 시간 전에 먹은 국수 가락이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졌다. 마누라 손 잡고 매년 서너 달씩 여행을 떠나자면 노후 대비 자금을 도대체 얼마나 곳간에 쌓아 둬야 하나. 새벽밥 먹고 출근해 별 보고 퇴근하지만 꼴랑 전달에 쓴 카드값 메우기에도 허덕대는 나는 아마 부산 일주도 버거울 거라는 자괴감에 입이 썼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여행자금이 빵빵해서인지 7천 원 염색 요금인데 만 원짜리 한 장 건네면서 그냥 넣어두란다. 문밖까지 마중 나가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작별인사를 건넸지만 우수리 3천 원이 어째 내 신세 같아 괜히 처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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