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되고 싶어하던 젊은 손님 얘기를 그제 신나게 끼적거리다가 인생 첫 연극 연습에 한창이던 대학 1학년일 적 내가 떠올랐다. 천둥벌거숭이로 허랑방탕하게 새내기 생활을 허비하던 차에 재미 삼아 학과 연극동아리 '도끼비'에 참여했다가 혼줄이 빠졌다.
배우에게 유연하고 분명한 발성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보다 명징하게 대사를 전달하기 위한 배우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하물며 옹알이를 하듯 발음이 입속에서만 노는 나라면 비록 국어국문학과 학술제 일환으로 올리는 이벤트성 연극이라 할지라도 무대에 서면 아무나 배우냐는 비아냥을 아니 들으려고 더 혹독하게 내 컴플렉스를 극복해내야 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과내가 아닌) 교내 연극동아리에서 배우와 연출가로 맹활약하던 같은 과 예비역 형을 연출가로 초빙해 연극 배우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익혔는데 그 기본기가 그렇게 버거울 줄이야. 유연하고 분명한 발음. 연출가 형이 전체 연습 일정 중에 절반 넘게 할애할 만큼 기본 중의 기본이었음에도 배우 하겠다고 깝죽대던 후배것들의 목구멍에선 단내가 났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옹알대던 버릇이 한두 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루아침에 고쳐질 거면 버릇이 아니다. 나아질 기미가 잘 안 보이자 연출 맡은 예비역 형 대체할 자원이 없으니 대놓고 뭐랄 수는 없어서 속깨나 썩었을 게다. 여간 아닌 민폐에 당사자 속은 더 타들어가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에 볼펜 물고 목청껏 대본을 읽고 또 읽다가 잠이 들곤 했다는 기성 배우의 초보 시절을 그대로 따라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미숙했던 게 어디 발음뿐이었으랴. 희곡 속 글자로 박제된 인물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재창조하는 작업이야말로 배우의 과업이자 극예술의 본질이다. 현실의 나를 내동댕이치고 극 중 배역으로의 빙의를 부단히 시도하다 마침내 몸에 딱 맞은 옷을 입듯 물아일체된 페르소나를 장착하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암만 몸부림쳐도 변신하지 못하는 나를 채근하면서 애꿎은 소주만 엔간히 퍼마셨던 게다.
그렇게 끌탕 중인 나날이 이어지다 부랴부랴 올랐던 첫 무대. 아마 숨은 막히고 머리는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조명이 켜지자마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연습 내내 치열하게 담금질한 '나 아닌 다른 자아'가 절대 벗겨지지 않는 가면을 쓰고서는 활활 타오르는 열정과 생동감으로 무대 여기저기를 누비는 순간, 쫄깃쫄깃하면서도 아리아리한 쾌감(그건 카타르시스였다!)에 빠져 바야흐로 나는 나를 잊었다. 그 순간 조금은 눈치챈 것도 같다. 1년 동안 번 돈이 남들 한 달 수입도 채 안 되면서 연극 배우가 무대를 떠나지 않는 까닭을. 연극이 마약 같다고 한 중견배우의 극언이 뜻하는 바를.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서면 득달같이 밀려드는 감정의 파고에 마음 다잡기란 쉽지 않다. 비로소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해하면서도 몸 속 모든 게 갑자기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상실감이랄지 무엇으로도 이 빈 껍데기만 남은 나를 채워줄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어지럽게 뒤섞인 복잡한 심사는 흡사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골로 가슴에 패일 뿐이다. 그 깊은 골짜기 사이로 충만해진 감수성이 나를 여지껏 지탱해 주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