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인생은 없다. 지향하던 목표가 도중에 꺾이고 다시 꺾이어 변형된 뜻밖의 결과가 나의 현재다. (박동환, 『X의 존재론』에서)
사회생활하다 인연을 맺은 친구가 있다. 그와는 공통점이 많다. 동갑에 학교만 다른 ROTC 출신, 십수 년 간 보험업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지하철 2호선 장산역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살고 있는 해운대 구민인 점이 그렇다. 먹고 살기 바빠서 격조하던 차에 저녁을 먹기로 하고 만난 적이 있었다. 밤보다 낮이 길다는 하지가 지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지 싶다.
장산역 주변 돼지국밥 가게에서 수 년 만에 재회를 했으면 반가운 김에 반주를 기울일 법도 하지만 그는 냉큼 금주를 선언했다. 다음 날 출근해 급히 처리해야 할 용무를 핑계로 대긴 했지만 으레 권할 걸 예상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계적으로 선을 긋는 품이 일상의 루틴을 깰 만큼 파격적이고 두터운 사이까지는 아니라는 걸 확인시키는 듯해 거리감이 느껴졌다.
후딱 국밥을 해치우고 들른 커피숍에서 얼굴 못 본 몇 년 간의 근황을 서로 전했다. 십수 년 동안 종사했던 외국계 생명보험회사 보험설계사를 작파하고 건설 일용직 소개업체(직업소개소) 운영에 매진한 지가 벌써 몇 해째라고 했다. 좋아진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경기는 역병이 돈 이후로는 바닥을 길 정도로 치명적이어서 죽지 못해 산다고 엄살을 떨어댔다. 공사다망하신 사장님께서 만나면 밍밍하고 아니 만나도 별로 안 섭섭하게 어중간한 사이인 지인과 천금같이 귀한 저녁 시간에 머리 맞대고 한가롭게 돼지국밥을 퍼먹고 커피 들이켜면서 할 소리는 아닌 성 싶은데다 말끝마다 남는 거 없이 밑지고 판다는 상고배의 뻔한 거짓말과 닮아서 커피가 영 썼다. 스마트팩토리라는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들먹거리면서 새로운 대안 어쩌구저쩌구 하는 걸로 봐서는 지금 하는 거 말고도 준비하는 게 또 있나 싶었다.
그와 안면 튼 지는 10년이 넘었다. 보험영업 중에 우연히 만나서 한동안 교류가 제법 잦았다. 사는 데가 지척 간이고 해서 만나면 소주잔도 곧잘 기울였고. 그는 점잖고 신중한 사람이다. 상대방 말을 잘 듣는 능력은 상대방을 정중하게 대해줌으로써 가능하다. 듣는 데 방점을 둔다는 건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얘기기도 하면서 그런 그를 상대방이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서 적당한 긴장감과 신중함이 대화 분위기에 녹아드는 효과가 있다. 그러다가도 술자리에서 몇 순배 술잔이 돌고 나면 그는 영악해진다. 취중이라는 가면을 쓰고선 진담을 늘어놓을 때면 격조, 품위니 하는 가식을 벗어 던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니까. 일단 그는 야무지고 포부가 당차다. 하여 당장의 작은 이익을 취했다고 안분지족하지 않는다. 흉중에 꼭꼭 숨겨둔 야망을 보따리 풀듯 특유의 저음으로 썰을 풀면 원대한 사업 청사진 브리핑을 듣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외유내강의 전형으로 확신한다. 가까이 하면 듬직해서 든든한데 혹 사람을 간보는 듯한 태도에 마음이 썩 편치 않는 느낌을 주는 사람.
주변에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관찰한 뒤 내린 결론이라면서 그날 술도 안 마셨으면서 분위기를 진지하게 까는 그였다. 수단이 좋은 아버지 직업을 물려받은 자식일수록 대를 이어 부자로 산댔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세무사인데 그 자식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해 아버지 사무실을 물려받는다면 아버지 거래처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법이랬다. 아버지 진료 종목을 좇아 의사가 된 자식, 사업체 지분을 상속받은 자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무임승차라고 비난할지 몰라도 잘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아등바등거리며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아비가 알아서 위험 요소를 미리 다 제거해둔 멍석에서 재주만 부리면 되니 이보다 더 안전한 유산이 어디 있겠냐는 거다.
자신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게 별로 없어서 자수성가만이 오로지 살 길이고 초등학생인 외아들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전혀 못 느끼게 탄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아비 된 자의 막중한 책임이라고도 분연히 강조했다. 삶에 대한 치열한 투쟁심과 냉철한 현실 감각이야 그 전에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지만 몇 년 만에 업그레이드된 버전에 직면하자 괜히 몸서리가 쳐졌다. 또래 부모의 보편적인 고민이라고 일견 수긍을 하면서도 ‘그렇게 살다가 네 인생은?’ 하고 되묻고 싶어서 혼났다. 아들한테 물려줄 직업이 뭐가 됐든 간에 물려줄 만큼 토대가 탄탄하고 입지가 공고해지자면 아비는 또 얼마나 애면글면할 텐가. 새벽 5시 반부터 근 12시간을 꼬박 책상머리를 지키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인력 수급 문제로 갖은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직업소개소 운영이 이러할진대 말이다.
그가 정작 누리고 싶은 허튼 짓이 무엇인지 나는 일전에 들어 잘 안다. 하지만 그 허튼 짓을 느긋하게 누리려고 하면 자신이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이 될 때까지는 고생스럽더라도 유보시키겠다는 건 개소리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겠다는 뜻으로 완곡하게 들리지만 나는 되레 추궁하고 싶어졌다. 허튼 짓을 누려도 개의치 않을 그 ‘수준 이상’은 어느 정도일까. ‘이 정도면 되얐다!’라고 직감했을 때 과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즉시 멈춰 세울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그러다 정작 한 줌도 안 되는 여생마저 소진되는 건 아닌지 나는 속으로만 묻고 또 물었다.
하지 지난 지 얼마 안 된 여름밤은 아직 저물지 않았고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귀갓길은 수상愁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