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소래담 빈 통

by 김대일

애들이 잠깐 나간 그 새를 못 참고 부부는 으르렁거렸다. 마누라가 내용물이 없는 멘소래담 로션 빈 통 2개를 흔들면서 "다 썼으면 버려야지!" 포문을 열더니 "애 건데 다 쓰면 어떡해!" 넘겨짚는 데는 귓등으로 흘려버리질 못하겠더라. 목하고 어깨가 자주 뭉쳐 한두 번 바른 적은 있지만 내가 몽땅 쓴 건 아니다. 펜싱에 열중한 뒤로 만성적인 무릎과 허벅지 통증에 시달리는 막내딸을 위한 전용 소염진통제인 줄 모르면 그게 같이 사는 아비인가. 그러니 설령 내 한 몸 건사하겠다고 슬쩍 도용한다 해도 정도껏 쓰고 남기는 매너는 있다.

그럼에도 제 몸뚱아리밖에 챙길 줄 모르는 철없는 아비로 몰아가는 마누라의 처사가 하도 억울하고 서운해서 한두 번 쓴 건 인정하지만 아주 바닥이 날 정도까진 아닌데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내가 들어도 순간 데시벨이 급상승한 신경질적인 어조로 항변을 했다.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다. 한두 발로 끝날 위협 사격에 섣부르게 응사한 결과는 참혹했다. 이어지는 마누라의 다연발 지청구에 그만 넉아웃이 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후벼팠던 건, "다 떨어졌으면 다시 사 놓을 생각은 어째 한 번도 안 하냐"는 지적이었다.

없는 걸 지어낼 리 없는 마누라라서 정확하다. 그래서 더 대거리할 의욕을 상실했다. 나도 안다. 십수 년째 내가 인색하다는 걸. 시원스럽게 지갑을 열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지갑에 든 게 별로 없어서 헤플래야 헤플 거도 없다. 마음은 큰딸 토익학원비를 선뜻 내주고 막내딸 몸보신 시키러 내가 먼저 앞장서서 고기집으로 향하며 그깟 멘소래담은 박스로 사다 놓지만 몰래 여투어 둔 비상금으로는 고공비행 중인 물가 치다꺼리하다 볼장 다 볼 게 뻔할 만치 궁색하다. 비상금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고 하면 달리 반박하지는 못하겠다만 알량한 쌈짓돈이나마 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떠는 좀팽이로 변한 나는 그 정도로 유난을 떨어댔으니 여지껏 겨우겨우 버텼다고 자위할 뿐이다. 지난 십수 년에 걸친 뒤웅박 신세에서 얻은 산 교훈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생존 방식이라고 하면 너무 비장하다. 하지만 어쨌든 십 원짜리 한 닢 꺼내려고 해도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멘소래담 통이 비었다는 걸 분명 알았지만 새 것으로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마누라의 지적질이 두고두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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