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장 후배

by 김대일

53사단 마크를 단 군복을 입은 현역병들이 내 점방에서 머리를 깎곤 한다. 인근 부산진구 예비군훈련장을 관할하는 53사단 예하 부대원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관이 두발 검사를 엄격하게 하는 편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그 까칠한 상관이 엊그제 머리 깎으러 왔다.

전형적인 장교머리 스타일에 옆과 뒤는 살갗이 보이게 바짝 깎아 달라고 주문하면서 "애들 많이 오지요?" 묻는데 그 말본새가 영락없는 지휘관이었다. 우루루 떼로 몰려와 깎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면서 상관 등쌀이 여간 아닌가 보다며 한 마디 거들었더니 "그게 접니다" 이런다. 중대장이냐 물었더니 대대장이랬다. 암만 전방전투사단이 아닌 지역방위사단이래도 말똥가리 두 개 박힌 중령이 사병들 머리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건 어째 모양 빠지는 짓 같아서 "요즘 편제가 변했나요?"라고 물었더니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예전 내가 군생활할 때와는 많이 달랐던 건 틀림없어 보였다.

말 나온 김에 강원도 원통에서 뺑이 친 내 군 경력을 넌지시 밝혔더니 대번에 "12사단에서 근무하셨군요"라고 해서 역시 현역 장교랑은 말이 좀 통하는갑다 싶어 "강릉 잠수함 사건 터지는 바람에 말년 다 되도록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했더니 격하게 호응하는 게 아닌가. "중위 계급장 달고 좀 편해질까 했는데 더 빡셉디다"라고 내 예전 계급까지 내처 밝혔더니 "ROTC 출신이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35기?" 넘겨짚는 걸 "33기"라고 고쳐줬더니 "저보다 9년 선배님이십니다" 고해성사를 한다. 그 뒤로 그는 후배로서 궁금한 한두 가지를 물어 보는 걸로 예의를 갖췄고 나도 깍듯하게 현역 대대장님으로 받들어 모셨다. 하지만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문을 닫은 뒤로 나는 커트 작업에만 몰두하고 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술은 꽉 다물고 현실을 부정하겠다는 듯 두 눈까지 질끈 감아버렸다. 둘 다 이 어색한 상황을 잠시 모면하려는 꼼수인 셈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예정에도 없던 호구 조사로 제 머리를 맡긴 깎새가 아홉 기수나 높은 선배면 여간하게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하는 대로 깎아 주면 다행이지만 영 마음에 안 들어도 항의는커녕 고쳐 달라고 애원하기가 거슥해서 손님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행사 자체가 원천봉쇄된 장면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대로 그런 껄적지근한 상황이 연출될까 저어되어 어떤 하자조차 용납하지 않게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바리캉을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하지만 그보다 더 내가 곤경스러웠던 건 자격지심이었다. 그가 출신학교를 물었을 때 나는 순순히 "부산대학교 110학군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좋은 학교 나오셨습니다"라면서 경의를 표했다. 내 말문이 닫힌 건 그 직후였다. 좋은 학교 나온 학군단 선배가 기껏 요금 5천 원짜리 커트나 해대는 하찮은 깎새로 전락한 게 백일하에 드러난, 비록 그가 내가 나온 학교 직속 후배가 아닐지라도 감출 수 없는 자괴감으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소싯적 얼어죽을 자존심을 아직도 전가의 보도인 양 품고 사는 그 어리석음을 언제쯤 묵은 때 벗기듯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지 이러는 내가 너무 싫어서 기분은 점점 엉망이 되어 버렸다.

커트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내가 먼저 "나이 들어 해먹을 게 별로 없고 해서 오랫동안 이 업에 종사하신 부친 권유를 받아들여 시작하게 됐지만 천직이 됐다"고 실토했다. 대구 계명대 출신이라고 밝힌 대대장은 "그러시군요"라며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분위기가 신파조로 흐르는 성싶어 "별은 달고 나와야지요?" 넌지시 건넸더니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로 응수한다. "연금은 받아야지요?"라고 내가 실리적으로 재차 묻자, "내년이면 딱 20년입니다"라는 기대에 부푼 대답이 돌아왔다. 나하고 9년 기수 터울이 졌는데 내년이 임관 20년째라면, 나도 어느덧 소위 계급장 단 지가 30년이 다 되어 가는 셈이다. 세월이 유수같긴 하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계산하고 나가는 대대장 뒷모습에 껄쩍지근함이 별로 보이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대대장 후배 둔 덕 좀 보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볼 작정이다. 통솔하는 예하 부대원들이 떼로 몰려 온다면 다음 번 대대장 요금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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