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쯤으로 기억한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개봉에 맞춰 한 유명 영화평론가가 쓴 칼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칼럼 제목이 '어벤져스의 농담'에서 엿보이듯 마블 특유의 유머 코드에 대한 상찬 같았다(<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경향신문, 2018.04.27.).
한국에서 일종의 문화 현상이 되어 버린 <어벤져스>와 달리 DC 코믹스 원작 영화들에 대한 한국 관객의 태도가 대단히 상반된 건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은 무겁고, 고독하고, 어두운 영웅으로 떠오르는 데 비해 같은 갑부임에도 아이언맨은 쿨하고 가벼워서다. 이런 아이언맨의 세계는 심각한 순간일수록 농담을 던지고 분위기를 녹이는 <어벤져스> 멤버들의 웃음과 더불어 긴장감을 풀어주고, 관객에게 공감을 높이려는 마블의 코드로써 한국 관객들에게 먹혔다는 거다. 하기사 런닝 타임 내내 깨부수고 두드려 패는 장면만 나오는 것도 질리지만, 칠흑 같이 어두운 배경에 피곤해진 안구로 똥 씹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배우들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줄곧 지켜봐야 하는 것도 곤욕스럽긴 매한가지다.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내뿜는 반인반신 영웅들로 스크린을 꽉 채우는 건 똑같으면서 <저스티스 리그>의 흥행이 왜 참패했느냐 내게 묻는다면 ‘엉뚱하지만 똑똑한 유머 장치 부재’라고 대답하겠다.
근자에 마블 공화국 한국에서 마블 영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흥행 보증수표' 마블 영화가 흔들린다, 한국일보, 2022.11.30.). 최근에 개봉한 마블 영화의 흥행이 줄줄이 시원찮다고 한다. 전작 '블랙 팬서'(2018)가 540만 명을 동원한 데 반해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지난 9일 개봉해 28일까지 200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271만 명에 그친 '토르: 러브 앤 썬더' 역시 전작(466만 명)에 훨씬 못 미쳤다. 흥행 수치도 떨어지는데 관객 평까지 전편보다 현저하게 낮단다. 연간 흥행 순위표를 보면 마블 영화의 약세가 두드러진다. 2022년 전체 흥행 순위는 작년, 그리고 역병이 돌기 전인 2019년보다 대체로 낮다.
마블 영화의 약세 요인으로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등의 퇴장 이후 새 캐릭터를 앞세워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지만 아직 낯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블 콘텐츠의 지나친 팽창이라는 것에 나는 더 방점을 찍고 싶다. "마니아들마저 숙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물 관계도가 복잡해지고 정보가 많아졌다"는 영화평론가의 지적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 스트레스 풀려고 들른 영화관에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물 관계도를 떠올리며 공부하듯 스크린을 응시하고 싶은 관객은 별로 없다. 드라마 <완다비전>을 시청하지 않으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면 마블 영화 보기를 관둬 인생의 즐거움 하나 버렸다고 전혀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진 않을 성싶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왜 자꾸 열흘 붉은 꽃은 없고(화무십일홍) 십 년 가는 권세가 없다(권불십년)는 성어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