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만 해도 장산 초입 대천공원으로 일요일마다 산책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아마 단풍이 한참 물이 오르던 깊은 가을께 일요일이었지 싶다. 박물관에 전시된 명필의 일필휘지라도 발견한 양 길바닥 낙서 앞에서 한참을 넋이 나간 적이 있었다. 한자 7자가 세로로 정갈하면서 반듯하게 쓰여져 있길래 한시의 한 구절임을 직감했다. 사진부터 우선 한 방 박고서 주섬주섬 읽어 나갔다.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낱자의 뜻은 대충 감이 왔지만 그걸 한데 묶은 구절 뜻은, 당연하게도, 가늠조차 아니 되어 검색 엔진을 열나게 돌렸다. 그러자 시 한 수가 떠억허니 등장했는데 다음과 같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 가벼이 해서는 안 되네)
未覺池塘春草夢(연못 가 봄풀에 얽힌 화사한 봄꿈 깨기도 전에)
階前梧葉已秋聲(섬돌 앞 오동잎은 이미 가을을 알리는구나)
성리학의 창시자라는 주희의 <우성偶成>이라는 7언 절구인데 한문깨나 익힌 풍류 등산객이 가을 정취에 취해 휘갈겼나 보다. 시간을 아껴 학문에 정진하라는 권학가로 읽히지만 오동잎梧葉이란 한자에 꽂힌 나는 故 최헌이 부른 <오동잎>이 자꾸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밤에/그 어디서 들려오나 귀뚜라미 우는 소리/고요하게 흐르는 밤의 적막을/어이해서 너만은 싫다고 울어대나/그 마음 서러우면 가을바람 따라서/너의 마음 멀리멀리 띄워보내 주려므나
고고한 성리학자가 부른 오동잎이나 최헌이 부른 오동잎이나 스산한 가을바람에 꺾어진 인생을 빗대는 건 매한가지니 아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멋대로 갖다붙이고는 <오동잎>을 흥얼거리며 가던 길 다시 걸어갔다. 다음 날은 굵은 빗줄기가 좍좍 쏟아지는 바람에 무척 안타까웠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분필로 쓴 결구가 빗물에 다 지워져 버리는 게 못내 아쉬워서 말이다.
유홍준 교수의 밀리언셀러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꺼내 읽다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란 글귀를 보고 길바닥 낙서가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곳곳에 고수는 있다'는데 그때 분필 낙서를 남긴 이도 은둔의 고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