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공한 사랑
밤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송림식당 여주인은 손님인 '그'에게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 얘기를 꺼낸다. 식당 근처 공단으로 전근 온 유부남과 근 삼 년을 연애했는데도 한번도 안 들키고 그들 사랑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룰을 지켰기 때문이랬다.
- 그 사람하고 나하고 첨에 붙었을 때 약속을 했소. 일주일에 딱 두 번 만나자. 회사로 전화하지 말자. 삐삐는 치되 요 옆 복덕방 전화번호로 치자. 뭐 그런 것. 가장 큰 약속이 전근 삼 년에 이 년 반 남았으니 이 년 반만 사귀자. 그 뒤로는 절대 만나지 말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자, 라는 거였소. 그 사람하고 그것도 그렇게 했소. 정확히 이 년 반 동안 빈틈없이 사랑했고 그 다음 그 사람은 서울로 갔소. 그 뒤로는 한 번도 안 봤소. 그래서 나는 성공한 사랑이라고 말하요.(「밤눈」, 한창훈, 『나는 여기가 좋다』, 문학동네, 63쪽)
정력도 션찮고 대범하지도 못한 사람한테 홀딱 넘어간 건 밤새 자기를 껴안고 조근조근 하던 말들이 그렇게 재미나고 정다웠기 때문이었다. 또 둘 다 음악을 좋아해 딱 자기 마음 같은 <연인들의 이야기>(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하고픈 이야기 너무 많은데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를 남자 품에 안겨 불렀고, 밤에 잘 때는 어떤 것 안 듣고 주로 <아들을 낳기 위한 발라드(아들린을 위한 발라드)>만 들었다.
- 오늘 그 사람이 전화를 했소.
화장터가 있는 산 중턱이라면서 칠 년 만에 그 사람 목소리를 들었지만, 한 번만 만나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안 했다. 룰을 지킨다고.
- 우리는 이미 마무리가 됐응게. 성공했응게. 그러믄 된 거요. 부인이 잘못됐는지, 아이가 잘못됐는지 그것을 내가 끝내 물어보지 안 한 것처럼, 그 사람도 그런 말 일절 안 했듯이 말이요. 몇 년 만의 전화가 그것이 다였소. 숨소리만 들었당게요.(같은 책, 65~66쪽)
룰을 지킨 사랑의 여운은 어떠할까. 여주인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 그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단 말이요. 곁에 있다면 서로 보듬고 이야기하고 그런 재미도 있겄지만 떠오르기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오지는 않지 않겄서라우. 아, 곁에 있는디 뭐 하러 생각하고 보고 싶고 하겄소. 그러니 결혼해서 해로한 것만큼이나 우리 사랑도 성공한 것 아니겄소.(같은 책, 61쪽)
마음 답답하고 울적하다가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나오는 사랑, 게다가 룰까지 지킨 사랑은 결별했어도 완전하면서 성공한 사랑이란다. 미련을 못 버리고 질척거리기 일쑤인 나는 이 소설을 너무 늦게 읽었다.
2. 오독誤讀한 사랑
순정을 다 바친 걸 무게로 달면 어느 누구 한 사람 처지지 않았건만 어떤 낌새도 안 보이고 남자 곁을 훌쩍 떠나는 게 사귄 시기가 다 다른데도 여자 셋이서 작당모의해 멍청한 사내 하나 등골을 빼먹을 대로 빼먹다가 수틀리니까 판을 엎는 격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판마냥 어쩜 그리 똑같은지. 남자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실연의 데자뷰로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아 똥과 된장을 분간조차 못하는 그로기 상태에 빠져 귀하디 귀한 청춘을 허송세월하고 만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앞의 두 여자보다 경우가 밝은 마지막 여자는 행방을 감추기 직전 전조를 슬쩍 보였다는 점이다.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카센터를 2곳이나 운영하는 홀아비를 지인한테서 소개를 받고 인사치레로 한두 번 만나줬을 뿐인데 자꾸 치근덕거려 성가시다며 남자 앞에서 무심한 척 푸념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미취학 딸을 둔 돌싱녀 입장에서 보면 경제력에 물음표 꼬리를 달고 사는 남자보다야 정욕으로 두 눈이 이글거리긴 해도 가진 건 돈밖에 없는 홀아비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가장 합당하긴 하지만 여자는 그간 너무 물렁물렁하게 살아오다 보니 쉽사리 정을 떼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아주 잠시 고뇌의 시간을 가지긴 했다. 남자는 남자 대로 연이은 실연의 아픔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야말로 해피엔딩인 사랑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면서 약이 바짝 오른 상태라 돌싱녀와 홀아비의 그렇고 그런 접촉을 한낱 해프닝으로 치부하면서도 신경이 아니 쓰일 수는 또 없었다.
김중배가 다이아를 들이밀데끼 돈질로 여자 홀리려는 홀아비 꿍꿍이야 안 봐도 뻔하다면서 그보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억, 조, 경, 해… 돈을 헤아리는 단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라는 위대한 power of love를 게거품을 품으면서 목을 놓아 불러제꼈건만 평소 헤실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무거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여자. 그렇게 마지막으로 살을 섞은 밤은 불통이었다. 밤일 치르고 돌아누운 여자의 맨어깨가 자꾸 들썩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회자정리의 애석함일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여자가 종적을 감춘 뒤 낯설지 않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허우적대던 남자 앞에 하루는 외제차 딜러인 후배가 나타나 그도 역시 잘 알고 지내던 그 여자한테 고급 승합차를 판 덕분에 실적에 적잖게 도움이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남자와의 관계를 모르는 딜러 후배는 여자가 돈 많은 홀아비한테 재가해 호사를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월척을 물었다면서 제 무용담을 신나게 씨월거렸다. 남자는 문득 여자가 고마웠다. 경우가 밝은 여자라 왜 남자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본인 입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이유를 밝힌 셈이니 말이다.
자기를 매정하게 차고 떠나버린 여자들을 쇼윈도 너머 마네킹을 쳐다보듯 관조할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간혹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호수처럼 고요한 망각의 심중으로 돌연 틈입하면 문득 묻는다. 꼭 그렇게 떠났어야만 했을까.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에 헌신하고 이별을 감행한다. 자기 의지대로 사랑하고 이별했을 뿐인데 그걸 오독誤讀한 댓가는 뼈에 사무친다. 그럼에도 배운 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랑은 깃털보다 가벼운 하찮음이자 쥐어도 쥐어도 흘러내리고 마는 한 줌의 모래일 뿐이라는 걸. 어디 꼭 사랑뿐이겠는가마는.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완성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넘치는 것은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마침내 자리를 내어줄 때, 사랑은 눈부신 그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요.(백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