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연하장(2)

by 김대일

모의국회 공연을 개최한 학과생들을 위한 격려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네.


많은 것들이 덧없이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연애 지속 기간도 해가 다르게 짧아져가는 이 덧없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부여잡고 지켜나가서 하나의 전통으로 지속시켰다는 것. 역시 멋지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82쪽)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의 모의국회 공연이랑 자네와 나 사이의 관계성을 얘기함에 있어 접점이 대관절 무엇일까마는 나는 김 교수의 언사 중에 유독 '전통'이란 단어에 매혹됐네. 다음은 2월의 졸업생들에게 전하는 축하문 중 한 대목이네.


여러분들에게는 창창한 미래가 있고, 진정한 평가의 시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찾아옵니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때 평가 기준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일까요? 좋은 이야기의 조건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오늘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좋은 등장인물이 필요하겠지요. (같은 책, 115쪽)


​ 졸업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남아 있는 큰 도전의 이야기의 일부라고 전하는 덕담과 우리의 관계성이 또 대관절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마는 여기서도 나는 인생의 좋은 이야기를 가지는 것이 삶을 평가하는 데 있어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이고 그러자면 좋은 등장인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대목에서 완전히 넉다운이 되었다네.

살다 보니 사라지는 많은 것들을 목격하고 나 역시 한 줄기 바람 되어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음을 까먹지 않는다네, memento mori. 그럼에도 내 인생의 맥락을 게걸스럽게 추구하려고 나는 애쓰는 중이고 그러자니 오래도록 이어져야 할 양식, 즉 전통이 필수적이라고 절감하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설령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이라고 할지라도 전통이라는 걸 결코 독자적으로 창출해내지는 못한다는 것일세. 모임의 호스트 격인 녀석이 저세상으로 뜨는 바람에 퇴락한 과거로 전락한 대학 과동기 모임은 그 좋은 예일세. 대놓고 일정을 정해 놓지는 않지만 만나다 보니 매년 분기마다 의기투합했던 그 시절은 그들과 함께 관계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켜켜이 쌓아올려 찬란한 한때였네. 만나봐야 저녁 반주 삼아 대폿잔이나 홀짝거리다 막차 끊길 시간이면 부랴부랴 귀가를 서두르지만 그런 장면을 다음에도 기약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표현을 따르자면 '어떤 것을 부여잡고 지켜나가서 하나의 전통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덕에 당시에는 내 덧없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다네. 게다가 관계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켜켜이 쌓아올리는 구성원 간에 점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비록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빈부의 격차가 눈에 띌 정도로 벌어지긴 했지만 모임의 최종 지향점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 모두의 끊임없는 노력 덕에 그들 스스로 '좋은 등장인물'로 진화했음을 주목해 주길 바라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서 내 주변은 전통과 좋은 등장인물이 사라진 박토로 변했고 맥락 없이 조각조각 단절된 일상을 놓칠세라 비집고 들어온 덧없음은 의외로 체류가 길어질 듯싶으이. 하여 자네에게 구닥다리 연하장인 양 글을 써보내는 건 혹시 자네와 내가 우리들만의 유구한 전통과 서로에게 좋은 등장인물이 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일 올 한 해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자 간절한 부탁을 담았음이니, 부디 올해는 꼭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지난 날의 격조를 일소해보는 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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