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뜸한 금요일 오후 커트점, 무료함을 달래려고 TV를 켜니 원장이 즐겨 본다는 상금 3억을 걸고 '노래 잘하는 왕'을 뽑는다는 노래 경연대회. 노래라면 한가락씩들 해서 나왔겠지만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 같아 영 재미를 못 느끼다가 12살, 8살짜리 아이 둘이 나와 어른들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후려 갈기듯 트로트를 구성지게 불러제끼길래 고 놈들 참 물건일세 감탄했다. 허나 나오지 않는 방귀로 꽉 찬 아랫뱃속마냥 더부룩한 느낌도 같이 슬며시 들었다. 요즘은 유치원생한테도 사랑이 뭔지나 아냐고 물으면 나를 뭘로 보냐면서 째려본다는데 초등학생이 사랑타령 늘어놓는다고 뭐라 토 달 사람은 별로 없겠다만 듣다 보면 저래도 되나 싶은 노랫말이 들어 있는 노래를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시켜 불렀다는 자평에서는 솔직히 아연실색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불렀더니 사랑이 안 보였고 <그 후로 오랫동안>을 부르곤 그 후로 오랫동안 사랑이 나타나지 않아 결혼을 못했다는 신승훈의 사례를 실없다 웃고 넘기면 그만이겠으나 꼭뒤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이 '오빠 한번 믿어봐', '나는 여자라서 행복해요' 따위 가사를 줄창 되뇌이다간 '젖은 손이 애처'롭다면서 집안일 안 도와주기 십상인 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노파심을 어쩌지 못하겠다.
충남풀뿌리여성네트워크 40~50대 시민 여성 활동가 모임은 대세 트렌드인 트로트 노랫말 속 시대착오적이거나 성별 고정관념이 포함됐는지를 조사 중이란다.( <트로트 속 성차별>, 한겨레, 2021.06.19) 노랫말을 분석하는 데 적용할 요소는, 첫째, 애정 관계에서 남성은 적극적, 여성은 수동적으로만 그리지 않는지, 둘째, 성별을 상징하는 표현 등에서 성차별적인 내용은 없는지, 셋째, 노골적인 외모 묘사의 대상으로만 여성을 그리지 않는지 등이란다. 올해 10월 최종 자료집 내는 게 목표라는데 심히 기대된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고…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트로트가 아무리 좋기로서니 이런 노랫말을 듣고 또 듣고 부르고 또 부르다간 여자는 무조건 순정적이고 수동적이어야 하고 남자는 울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히지 않는다 누가 보장할까. 믿고 싶지 않지만 '가수는 노래 따라 간다'는 속설이 좀 심상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