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일요일(81)

by 김대일

운수 좋은 날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자리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 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ㆁ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

(에로티시즘을 천진난만한 유머로 버무리는 데 탁월한 시인을 나는 사랑한다. 글을 이렇게 부려 써야 하는데 그 경지에 오른 시인을 경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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