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인간 유형에 흥미가 없지만 보면 훈훈해서 좋은 걸 어쩌랴. 초6짜리 사내이이가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깎새 아저씨 묻는 말에 정확한 발음으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쾌하게 또박또박 그것도 내내 웃는 낯(웃는 상을 타고났으니 천운이다)으로 답변을 하면 요즘 아이답잖게 경우 바른 본새라 이뻐 죽을 것 같은데 어쩌랴.
지난 달 왼무릎에 깁스를 하고 아빠랑 왔을 때 내 새끼 다친 것마냥 가슴이 철렁해서 바리캉 쥔 손이 다 떨렸다. 엄마와 같이 온 엊그제도 크기만 작아졌을 뿐 깁스는 여전해 마음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애엄마의 립서비스로 마음 스르르 풀리면서 새삼 녀석 기특한 줄 알았다.
"할아버지댁 갔다가 오는 길인데 굳이 머리 깎으러 가야겠대요. 아저씨가 한 달마다 안 깎으면 지저분해져서 보기 싫은 머리랬다고 오늘이 딱 한 달 되는 날이라면서요. 저녁 늦었다고 내일 아침에 가재도 막무가내라."
되우 심한 곱슬머리에 머리카락은 철삿줄같은데다 빨리 자라다 보니 깎는 시기를 놓치면 집에서 내놓은 자식 몰골이라 한 말인데 그걸 귀담아 듣고는 꼬박꼬박 날짜를 지키는 녀석이다. 녀석을 중심으로 펼쳐진 세계에서 깎새가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마는 꼰대 언사조차 허투루 듣지 않는 태도는 딱 내 스타일이다. 하는 짓짓이 지금은 해병대 서해 전방사단에서 뺑이를 치고 있을 처갓집 손위 동서네 아들내미와 어슷비슷해 예의 '아들 키우는 재미'가 자발없이 또 부러워졌다.
천성이 유해서 남 앞에서 싫은 소리를 못 하니 손해 보는 게 다반사다. 무릎 다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유도를 즐겨라 하는 녀석이라 친구들과 어울리다 일종의 대련 상대가 되어줬나 보다. 낙법을 배웠으니 주로 꺼꾸러지는 쪽은 녀석이었고 아이 부모의 표현을 빌자면 착한 애만 골라 해코지를 해대는 성질머리 못된 친구한테 당해 무릎뼈가 나갔다나 어쨌다나. 세면대에서 머리를 다 감고 말리는 녀석한테 다리를 다쳐 한동안 유도를 못해 아쉽겠다고 위로를 건네자 "유도 안 시키려구요" 하고 엄마가 대신 대답을 했다.
"다친 데 계속 다쳐서 험한 운동은 더 이상 못 시키고 아이가 굳이 하겠대도 말릴 겁니다."
"아이 건강 생각하면 그런데 얘가 좀 답답하겠어요. 전에 보니 운동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괜찮아요. 다른 거 시키면 돼요. 우리 애가 못하는 게 없어요. 공부 잘하지, 얼굴 잘 생겼지, 손재주가 기가 막혀 못 만드는 게 없어요. 뭐가 아쉬워서 험한 운동 계속 시켜요? 그거 안 해도 우리 애 잘 될 겁니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전형적으로 흘러 자칫 지루해질지 모를 아이의 인생에 엄마가 극적 긴장을 유발하는 입체적 인물로 역할을 톡톡히 해낼는지 모르겠으나 왠지 극성스러워 보여 나로서는 기껏 부풀려 놓은 풍선 바람 빠지듯 허탈한 기분이 들어 입맛이 씁쓸했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원만하게 해피엔딩으로 대단원을 향해 가는 것도 괜찮은 인생극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