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통고

by 김대일

난생 처음 연애에 빠진 막내딸은 그제부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별을 통고한 쪽은 다행스럽게도(?) 막내딸이었다. 정확하게 열엿새 사귀다 말았으니 용두사미는커녕 시작도 하기 전에 막살한 꼴이라 두 사람 사이 만남을 교제니 연애 따위로 정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허나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이고 보면 열엿새 저녁 내내 붙어다니면서 나눴을 교감의 질은 무시하진 못할 성싶다.

이별을 통고하기 전날 밤 왜 헤어져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아비에게 조목조목 나열하는데 어쭈, 논리적이고 치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걸 여기에다 일일이 되새김질하는 건 전 남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관두겠다. 요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건 남자쪽이고 그로 인해 막내딸은 질려서 예전에 샘솟았던 호감이 싹 달아나 교제를 이어가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이쯤에서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최종적으로 판단내렸다. 하여 자기쪽에서 정중하게 이별을 통고할 작정이랬다.

어물어물 망설이고 결단성이 없기로 아비를 빼다박은 녀석이 결심이 서자마자 일사천리로 실행에 옮기니 아비가 아연실색할밖에. 쉬는 화요일인 그제 저녁 같이 밥을 먹으면서 카톡으로 이별을 통고했다고 덤덤하게 전하는 막내딸.

"마음 안 다치게 정성을 다해, 그리고 정중하게 장문으로 무려 세 줄이나 써서 보내니까."

"보내니까?"

"실망하는 눈치더라구. 그래서 서로에게 좋은 마음이 들면 그때 다시 만나기로 하자고 다독였지."

"그랬더니?"

"다시 생각해주면 안 되겠냬. 그래서 또 정성을 기울여서 장황하게 써서 보냈지. 좋아하는 감정이 없는데 만나는 건 서로에게 별로 유익한 것 같지 않으니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맞다고 말야."

"대답이?"

"내 톡을 씹었어. 이후로 여태 대답이 없어. 끝까지 싸가지없네 참."

서당개가 풍월을 읊듯 여자 셋과 한 지붕 아래에서 꽤 오래 살다 보니 '여자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자연스레 넓어지는 복을 누린다. 아울러 여자한테 일방적으로 차였다는 점에서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키는 막내딸의 전 남친한테, 비록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는 동시에 어디 내놓아도 전혀 꿀리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여자만 만났다 하면 이별 통고조차 없이 헌신짝 버려지듯 차이기 일쑤였던 그 까닭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도와준 단서 제공자로서 서글픈 감사를 전하고 싶다. 좀 씁쓸한 현실이지만 차일 만하니까 차였다. 영락없이 데칼코마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를 받으면, 일단 그 통고가 정말 갑작스러운 것인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통고를 받는 입장에서야 청천벽력 같을지 몰라도, 이별을 통고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죠. 당신은 계속되는 경고 신호를 무심코 흘려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여자친구가 "우리 만날 때 이렇게 기운이 빠지고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작게 탄식한 적이 있었나요? 그때 혹시 "기운을 내!"라고 하이파이브 한번으로 때우지 않았나요? 청천벽력 같은 하이파이브에, 여자친구는 이미 '아, 이놈은 발전이 없구나'라고 마음을 접었을 수도 있습니다.(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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