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하고 며칠 안 지났을 때다.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중년남이 머리는 덥수룩하게 해서는 점방으로 들어왔다. 요금 낼 돈이 없는데 머리는 꼭 깎아야겠다면서 무임 커트를 애원했다. 황당했지만 솔직해서 다음에 이러면 쫓아내겠다는 다짐을 받고 깎아줬다.
엊그제 온 손님은 좀 특이하다. 머리 스타일이 전형적인 스포츠형이라 다 깎으면 다시 손 볼 일이 그닥 없다. 그럼에도 그 손님은 머리 감을 거 다 감고 스킨, 로션 바를 거 다 바르고도 손님 대기용 의자에 앉아 뭉그적거리기 일쑤였다. 엊그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창 다른 손님 머리를 깎느라 여념이 없는 내 등 뒤에서 어김없이 뭉그적거리길래 "뭐가 필요하세요?" 물었다. 그러자 거울을 보면서 털도 별로 안 남은 머리를 매만지며 손 볼 데가 없냐고 묻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으면서 신기했다. 올 적마다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게 일정하게 유지하는 동선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커트점에 들른 김에 꼭 해야 할 루틴? 징크스?
특별히 모난 데가 없다고 점잖게 설명해주고 나니 그 손님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성싶었다. 요금을 치르려나 보다 하고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기다렸더니 짤랑짤랑 동전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천 원짜리 지폐 네 장과 동전 몇 닢을 건네면서, "백 원이 모자라요." 한다. 하도 천연덕스러워서 순간 얼떨떨했다. 작심하고 백 원이 모자라는 5,000원을 결재하는 사람한테 마저 채워서 정확하게 요금을 내란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백 원 때문에 인심 사납다는 소문이 날까 두렵기도 해서 군말 없이 받긴 했다. 비굴한 목소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띄엄띄엄 인사를 하고 손님이 점방 문을 나서자 그때서야 부아가 치밀었다.
요금을 덜 받아 노여웠던 게 아니다. 개업 초기 돈 없다고 미리 실토하고선 머리를 깎아 달라고 부탁하던 사람한테는 있는데 엊그제 손님한테서는 없는 게 나는 자존심이라고 본다. 당장 수중에 가진 돈은 없지만 당신이 내 머리를 단정하게 깎아 준다면 다음 날 면접을 훨씬 잘 볼 수 있을 테고 그 덕에 취업을 한다면 다음 번에는 요금 제대로 치르고 머리를 깎을 거고 단골도 될 것이니 당신은 나를 업수이 여기지 말고 머리를 반드시 깎아 줘야 한다는 배짱은 수중에 돈이 모자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깎고 난 다음 배 째라는 식의 불순한 막무가내와는 성격이 분명 다르다. 이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나'라는 사람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 자존심인 셈이다. 엊그제 그 손님을 내가 경멸하는 까닭은 동전 한 닢 때문에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으로 전락시킨 행상머리 때문이다. 한 번 맛을 들였으니 다음에 또 그러지 말라는 법 없다. 그런 손님은 한 트럭으로 데려 와도 필요없다. 또 그러면 내 점방에 다신 발 못 붙이게 만들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