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족속

by 김대일

전날 과음을 해 몰골이 말이 아니라고 깎새한테 미안해하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노숙인을 방불케 하는 첫인상이 솔직히 마뜩잖았는데 손님 쪽에서 먼저 저러고 나오니 내가 다 무안했다. 머리에 바른 염색약 물이 잘 들게 기다리던 도중 "명퇴하고 이발 기술 배우고 싶었는데 때를 놓치는 바람에 타일 기술을 대신 익혔어요. 10년이 넘었는데도 변변한 기술자 소리 못 듣는 처지지만서도." 먼저 호감을 드러냈다. "명퇴라 하셨는데 전직이?" 맞장구를 치면 염색약 물드는 20분은 쏜살같다.

소방관으로 20년 1개월 근무하다가 명퇴를 했단다. 재직 20년을 넘긴 이가 명퇴를 신청할 경우 두둑한 명퇴금 준다는 말에 혹해 20년 넘긴 1개월째 미련없이 직을 내던졌다. 실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15년 간 구급 업무로 잔뼈가 굵은 이가 화재진압반으로 옮겨 근무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체력은 달리고 상대적으로 숙련도까지 떨어지니 업무가 재밌을 리 만무했다. 따지고 보면 5년도 꽤 오래 버틴 거다. 명퇴 위로금에 월급에서 매달 5만 원씩 떼던 공제금을 돌려받은 것도 모자라 가족들 반대를 무릅쓰고 퇴직금까지 일시금으로 챙겨 미련없이 박차고 나왔단다. 목숨값에 비해 썩 대접받지 못하는 우리나라 전직 소방관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흥분해서 그가 활약했던 소방관 세계에 대해 작심하고 물어보려 했으나 내 바람과는 달리 소방관이 얽히긴 했으나 영 딴판인 이야기로 그는 화제를 몰아갔다.

지금 여당이 소방관을 싫어하는 까닭이 모지리 대통령과 그 하수인인 법무부장관이 검찰 출신이라 교정 공무원과 경찰 공무원을 밀어서만은 아니고 오래전 119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된 악연 때문이라고 손님은 밝혔다.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 경기도지사가 119에 전화를 걸어 "도지삽니다"라고 한 뒤 소방관에게 관등성명을 밝히라고 했지만 그 소방관은 장난전화로 판단 (119는 긴급전화이니)일반전화로 문의하라면서 전화를 끊는다. 열이 난 도지사 다시 119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전화 받은 소방관 관등성명을 대라고 했고 영문 모르는 소방관(다른 소방관임)은 도지사라고 밝힌 이와 횡설수설하다가 전화를 끊었던 사건. 소방본부는 전화를 받았던 소방관들에게 징계성 인사조치를 결정했지만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도시자가 해당 소방서를 직접 방문, 인사 조치를 철회하라고 지시해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이 보였지만 이로 인해 경기도지사는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정치생명도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헛발질은 권위적인 도지시가 했는데 이후로 도지사가 속해 있던 정당의 패거리들은 엉뚱하게도 소방공무원 세계에 앙심을 품었었나 보다. 자기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집단이라 코가 납작해지게 손을 볼 구박덩어리쯤으로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나. 명퇴한 지 10년이 넘은 전직 소방관의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개연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성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전직이었다고는 하나 소방관 세계의 내밀한 사정을 일반인보다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기다리는 손님들 심심풀이용으로 갖다 놓은 신문을 펼치면서 전직 소방관은 이렇게 말했다.

"메이저라는 신문은 너무 편파적이어서 신문 안 본 지 오래였는데 사장님은 좀 다르네요."

"안 본 건 아닌데 나이가 들면서 비위가 영 안 좋아졌는지 그것들 읽다 자꾸 메스꺼워져서 라인업을 싹 바꿨지요."

도둑, 깡패 때려잡는 법의 수호자로 조국에 충성하고 받는 월 연금액이 너무 적다고 투정을 부리던 전직 형사 출신 손님은 대낮임에도 문뱃내를 풍기지만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추한 꼴 보이기 싫어서 나중에 받을 연금액까지 탈탈 털어 일시금으로 챙긴 뒤 일머리없는 타일 기술자로 전락한 전직 소방관은 같은 시민의 공복인데도 왠지 느낌은 천지차이다. 다른 나라 가면 '수퍼맨'이라고 추앙까지 받지만 무능한 정상배 때문에 대접다운 대접 못 받는 이 나라 공복은 어째 '슬픈 족속' 같아 마음이 짠하다. 전직 소방관과 20분이라는 짧은 대화가 별의별 생각을 다 들게 만들었다. 망언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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