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적중

by 김대일

내 예감이 맞았다. 큰딸은 엄마한테 복학하지 않고 간호학과 편입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마누라는 제 아비 젊었을 때랑 판박이라면서 비꼬았지만 이미 결심이 선 마당이라 회유는 단념한 눈치다.

마누라 핀잔은 당연했다. 재무설계사 해보겠다고(그래봐야 보험설계사일 뿐인데)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 치우더니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라는 자격증을 취득하면 재무설계 분야에서 칙사 대접을 받을 거라며 보험 팔아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수삼 년을 책상머리에서 날려 버린 전적은 암만 좋게 돌이켜본들 순진함의 극치였다. 변호사, 회계사 따위 따놓기만 하면 무슨 수가 생겨도 생기는 자격증하고는 그 성격이 너무 달라서 보험 영업 기반이 엔간히 쌓여야지 겨우 명함 내밀 정도라는 걸 나중에야 알아챘다. 게다가 기껏 어렵게 따놓고 보니 자격증 초과 공급 상태가 된 지 오래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찬밥 신세로 전락해 버렸고 자격증만 따면 탄탄대로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생활비, 활동비로 미리 당겨 쓴 게 오롯이 빚으로 남아 종국에 쪽박을 차기에 이르렀으니 그 전 과정을 목도한 마누라 입장에서 공부의 '공'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릴 판이었으리라.

이후로도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를 만회한답시고 이런 밥벌이, 저런 일자리 준비한다고 처바른 돈이며 시간이 또 얼마였던가. 어렵게 딴 직업상담사 자격증으로 기껏 구한 게 한 지자체 일자리센터 9개월짜리 기간제 근무였고 그마저도 연장 계약을 거절당했다. 나이가 들어도 취업길이 상대적으로 넓다는 주택관리사, 사회복지사 자격증에 손을 댔지만 인강 몇 달 눈 빠지게 보다가 피치 못할 사정이 겹쳐 흐지부지 중도에 관둔 것까지 별 소득도 없이 공부만 일삼다 좋은 세월 다 날려 버린 백면서생을 남편만 아니면 때려 죽여도 시원찮았을 마누라였다. 그런 아비의 전철을 밟으려는 큰딸이 마누라는 불안한 것이고 싸잡아서 험한 소리를 쏟아내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원죄를 짊어진 나는 뒷방 노인네처럼 물러앉아 입도 뻥긋 못한 채 주눅들 수밖에 없고.

하지만 큰딸이 복학을 안 할지 모른다고 예견한 이전글(「복학을 할지 말지」, 2023.01.05.)에서 밝혔듯, 큰딸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토 달지 않을 작정이고 막내딸을 포함해 내 두 딸이 자유롭기를 정말 바란다. 결국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인생은 아니지 않나. 설령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도 원없이 해봤으니 후회가 없을 테고 쓰잘데기 없는 미련 때문에 평생 원망스럽게 곱씹고 살 까닭도 없지 않겠나. 다만, 자유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고​ 가족이라서 서로가 서로를 맞춰 주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혜가 필요하긴 하다. 마누라 입장에서 보면 투자 대비 효율이 현저하게 낮은 뻘짓이 사람을 얼마나 비루하게 만드는지 제 아비의 선례가 버젓이 있음에도 같은 길을 굳이 가려 하는 큰딸이 영 마땅치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큰딸도 제 고집만을 내세워서는 안 되고 절충이 필요한 시점이다. 연휴 마지막 날, 아침 알바를 가는 큰딸을 차로 태워 주면서 넌지시 부탁했다.

"엄마한테 얘기 들었다. 아빠는 너한테 잔소리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전적으로 지지한다. 다만, 지금까지 고생한 엄마를 생각하면 너도 네 고집만 부리기에는 명분이 적은 성싶다. 지난 2년 약학대학원 편입 준비한다는 너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엄마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기한을 정해 엄마가 수긍할 만한 성과를 거두는 게 맞다고 본다. 안 그러면 네 엄마 폭발할지도 모른다. 이제 너도 썩 적은 나이도 아니고. 또 한가지, 알바가 네 직업일 수는 없다는 점도 염두에 뒀으면 한다."

이해하는 눈치지만 생각이 많아졌는지 대답이 없는 큰딸이었다. 모범적이지 않은 아비의 충고로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나마 일었다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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