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단, 같은 연대, 같은 대대도 모자라 주둔지까지 똑같은 데서 군생활한 생면부지인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는 높겠지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닐 게다. 군생활 배경이 된 시절이 쿠데타를 일으킨 뻐꺼지 장군이 대통령으로 군림하던 무렵이었으니까 나보다 십수 년은 터울이 지는 셈이다. 이발병으로 발탁된 사연을 늘어놓던 중에 '강원도 원통 12사단'이 툭 튀어나와서 혹시나 했다. 귀 익은 '37연대'까지 거침이 없자 별일 아닌데도 괜히 설레면서 설마했는데 '서화리 2대대'라고 명토를 박자 행방이 묘연했던 배다른 형이라도 상봉한 듯 그렇게 반갑고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양반은 7중대, 나는 8중대로 달랐지만 그건 별로 의미가 없다. 4개 중대가 한 대대 주둔지에 옹기종기 모여 살며 같은 취사병이 만들어 준 밥을 같은 식당에서 먹는 한식구였으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근무할 당시 전방 철책 경계가 주요 임무였던 강원도 산악부대는 대대가 돌아가면서 대여섯 달씩 전방에 투입되기 때문에 한 곳에 부대가 정착하는 게 아니고 직전에 투입됐다가 철수한 대대에게 인계하는 식으로 주둔지가 매번 바뀌었다. 그러니 그 양반이 한창 활약하던 시절의 2대대가 주둔하던 서화리가 내가 전방에 투입되기 전까지 지내던 서화리와 용케 같아서 반가움은 배가되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어지는 이야기의 맥락을 짚어 나가다 보니 이 양반이 아니었다면 당시 2대대가 제대로 굴러갔을까 싶을 만큼 자기 공치사가 너무 심했다. 연대장과 끈끈한 친분을 과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땡보직으로 빠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땅개중대로 배속을 자청(여린 성격을 개조하려고 사서 고생했다는 명분이지만 썩 와닿지는 않았다)했다는 둥 펀치볼 단독 경계 근무할 때 고참들한테 제공할 술을 추진하러 지뢰밭을 뚫고 민간인 마을로 내려갔다 오는 그 어려운 짓을 혼자서 도맡았다는 둥 군생활의 꽃이라는 사단장 표창을 두 번씩이나 수상했는데 그 백미는 전역 일주일 남기고 사단 주관 분대 전술훈련에서 우승해 일주일 포상휴가를 탔지만 후임한테 넘긴 일(어차피 일주일 뒤 전역이라 휴가를 즐기다가 부대 복귀를 한다 치면 전역일보다 하루 늦게 전역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어 무의미하다는 건 군대를 안 간 이들도 잘 알 터이니 굳이 생색낼 건 아닌데도 그 양반 생색은 대단했다)까지, 일반염색보다 10분 정도 일찍 염색 작업이 끝나는 고급염색을 그가 주문하지 않았다면 그의 방자한 허풍선을 내 고막이 10년 같은 10분이나 더 감당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면부지인 그가 정말 반가웠던 까닭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유형流刑의 땅(군생활로 한정 짓겠다. 거긴 몇 안 남은 우리나라 청정지역 중 한 곳이라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천혜의 땅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쪽을 보고 오줌도 안 눈다)에서 청춘을 쏟은 지난했던 군생활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공감해 줄 성싶은 전우를 뜻밖에 만나서였다. 하여 그가 나한테 지상가상없이 퍼부은 무용담까지는 아니겠지만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2년을 거기서 보냈던 내 노고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 양반이 점방에 머무른 반 시진 동안 '12사단 37연대 2대대'라는 공통점을 발견한 뒤로 내 말문은 반강제로 셔터가 내려졌고 거의 자기 우상화나 다름없는 요설에 주눅이 든 나는 하마터면 점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넙죽 절하면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운운할 뻔했다.
나도 주워섬기고 싶었다.
'북한 무장공비 26명이 잠수함으로 강릉 일대에 침투하자 소탕 작전이 벌어졌는데 전시상태나 다름없이 근 2달을 견뎌야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즈음에 우리 대대가 전방으로 투입됐는데 전방 철책 지키는 것만으로도 여념이 없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수색, 매복까지 나가느라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소탕되지 않은 무장공비 잔당이 북으로 올라갈 예상 루트 중 하나가 내가 맡은 전방 섹터여서 더 그랬을 겁니다. 소대원들 데리고 매복 나가는 소대장이 품을 생각은 아니지만 적군 아군 따질 것 없이 워낙 많은 군인이 죽던 때라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면 원통해서 어찌할 것인가 원통이란 땅에서 수십 수백 번 되뇌였던 게 기억납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