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비정한 거래

by 김대일

자동차 배터리 방전되는 걸 방지하려면 차를 안 몰아도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시동을 켜두는 게 좋다는 긴급출동 아저씨 조언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나흘에 한 번씩은 퇴근하고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차 시동을 켜는 게 일상이 된 지 좀 됐다. 시동을 켠 김에 동네 한 바퀴 돌아봐도 될 법하지만 나갔다 돌아오면 주차장이 만차라 주차할 데 찾느라 헤매는 것보다는 시동만 켜두고 한 이십 분 멍 때리는 게 신상에 더 이롭다.

하지만 지난 주말 밤 막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막내딸이 드라이브를 시켜 달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요청이면 그깟 주차 공간 찾으러 헤매는 짓쯤 대수냐며 송정 바닷가로 엑셀을 밟았다.

나는 안다. 낮이면 몰라도 저녁 노을이 지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나서질 않는 막내딸이 그처럼 돌발 행동을 할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임을. 지극히 현실적이라 에두르지 않고 본질로 곧장 나아가는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엄마한테 꺼냈다간 쓸데없는 잡생각이란 지청구 돌아오기 딱인 속엣말을 둘이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여도 부담이 별로 없는 아비한테는 가끔씩 속시원하게 퍼붓고선 응어리를 풀곤 하는 녀석이니 뭔가 부대끼는 게 분명 있으렷다.

아니나 다를까 달맞이언덕길을 나와 송정 바닷가로 빠지는 샛길로 접어들자 녀석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당장 드러낸 고민은 펜싱 특기생으로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예정인 동기가 자기보다 운동을 늦게 시작했음에도 요즘 들어 만약 열 번을 맞붙으면 두어 번은 이기는 일이 잦아졌다는 거다. 절대 우위를 지킬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가 자꾸 나오니 스트레스가 쌓이는가 보더라. 게다가 동기 실력은 일취월장하는데 자기는 늘기는커녕 정체된 듯싶어 불안하고 속상하다면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못해 혼자 끙끙 앓기만 하는 여린 녀석이라 속깨나 끓였을 게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막내딸은 많아지는 생각 만큼이나 스트레스까지 느는 게 역력해 뵌다. 동기 실력이 늘어서 샘이 난다는 식의 고민은 어쩌면 이전까지는 안 겪어 봐서 그 실체가 와닿지 않던 인생의 가시밭길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자기를 은폐하려는 핑계일지 모른다고 나는 짐작한다. 정말 재미있어서 시작한 펜싱인데 부담으로 변질되면 곤란하다. 겨울방학임에도 진학할 고등학교 체육관으로 매일 출근해 저녁까지 훈련하는 건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서 고역이다. 운동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그렇듯 부상을 달고 사는 것도 전에는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이다. 어쨌든 펜싱 특기생으로 진학했으면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니 앞으로는 긴장의 연속이고 중학교 시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중압감이 상존할 터인데 단단히 각오를 했음에도 막상 받아들이기가 벅찬 것도 사실이다. 하루하루를 구김살 없이 행복하게 보내던 녀석이 무거운 짐을 진 듯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눈치가 나잇살 먹은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인생이란 비정한 거래를 알아챈 듯싶어 씁쓸하다.

아비된 자가 자식에게 건네줄 인생의 묘약 같은 게 뭔지 가끔 심각하게 고민한다. 당연하게도 묘약, 묘책, 묘수 따위 요행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먼저 살아본 경험에서 뽑아낸 급조된 대안을 제시할 뿐이지만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받아들이는 이의 판단 여하에 달렸다. 그럼에도 저녁 드라이브를 즐기는 자동차 안에서 아비는 조근조근한 말투로 막내딸의 고민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장황하게 떠들었지 아마. 하지만 조리가 별로 없어 무슨 말을 떠들었는지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이 대사만 빼고.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돼. 아빠가 살면서 뼈저리게 느낀 거야. 서두를 것 없어. 인생 너무 빡빡하게 굴 필요도 없어. 급하게 먹으면 정말 체한다니까. 오늘 아니면 내일, 모레도 있으니까 꼭 느긋해야 돼."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막내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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